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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회사(GIAI)가 후원금을 받으면서 회사 이름도 후원자의 이름을 따라 바꾸게 된다.
- The Gordon Institute of Artificial Intelligence
회사 방침이 이것저것 변경이 되기도 하고, 나름대로 큰 사건이라 이사회 참석 차 출장길에 나섰다가, 오랜만에 런던에 살고 있는 석사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난 다음에 운영하는 서비스들을 이것저것 보여줬더니,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이
How could you keep the quality?
였는데, 그간 SIAI 학생들을 괴롭혔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고, The Economy의 영문/한글 고급 기사를 쓰도록 직원들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했던 것도 미안한 마음이 좀 잦아드는 한 마디였다.
특히 SIAI 학생들 졸업 논문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받아서 여기까지 끌어올린 이야기를 듣더니 하나같이 충격을 먹더라. 우리가 공부하던 시절에 이렇게 챙겨주는 교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아쉬움과 더불어, 우리도 대부분 도망갔던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살아남는 애들이 별로 없었을텐데, 보통 고생이 아니었겠다는 위로도 받았다.
취리히에서 새롭게 채용하는 교수도 처음에는 우리를 만만하게 봤던 것 같던데, 학생들이 Case Study에 냈던 발표 자료, 근데 그걸 내가 사정없이 커트 시켜버린 이야기를 듣더니, 그 정도 콘텐츠를 갖고 오는 학생은 어떻게 입학 시켰고, 또 어떻게 키워냈냐,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OK를 해주느냐, 졸업한 애들은 그럼 수준이 남다르겠다는 식으로 굉장히 겸손한 자세로 바뀌더라.
런던의 친구들이나 채용하는 교수진들의 반응을 보면서 동료들이 날 콘텐츠 총괄 담당자로 계속 앉혀 놓겠구나 싶어서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우리가 계속 퀄리티 게임을 하려면 앞으로 채용이나 학생 선발 과정이 더더욱 버겁겠다는 무게감도 함께 느껴졌었다.

1류 조직으로 성장한다는 것
지난 몇 년간 꾸준히 한국 조직을 최소화했고, 몇 달 안에 지금보다 더 작은 조직으로 줄어들 것이다. SIAI에도 한국인 학생이 아마 더 올 것 같지는 않고, 나 역시도 한국 시장 자체에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됐다. 이번 출장 중에 취리히, 프랑크푸르트와 더불어 예전에 살았던 런던 일대 집들과 Executive AI MBA를 주로 운영할 계획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일대의 집들을 한참 봤었다. 어디를 유럽 베이스로 최종 낙점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무실은 온라인으로만 운영되는 슬림한 조직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선 만큼, 더 이상 미련은 없는 상태다.
왜 이렇게 비관적인 관점으로 한국 시장을 보냐면,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급여를 많이 주고, 각종 복지를 탄탄하게 챙겨주면 그런 인력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인력들의 사고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몇 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고(高)연봉, 다(多)복지를 챙겨주면서까지 수익성을 낼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싶더라.
가끔 검색 중에 우연히 보는 국내 직장인들, 30-40대 위주의, 혹은 20대 취준생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한국인들의 사고 방식을 보면, 내가 노력해서 만든 콘텐츠, 상품이 우리 회사의 얼굴이 되고, 그게 다시 내가 시장에서 인정받는 무기가 되는 선순환 구조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하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인정해주는 학력, 자격증, 직장을 찾아가는데만 몰두했고, 자신의 특성을 잘 살리는 커리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년에 취리히에서 AI/Finance 주제로 학회 세미나를 열텐데, 좀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만난 런던 친구들이, 굳이 가야되냐는 표정을 짓다가 SIAI 졸업생들의 논문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눈으로 우리 주변에 누구를 더 부를까는 식으로 협조적으로 나온 것, 취리히에서 채용 면접을 보던 교수 후보들이 학생들 수업 교재, 케이스 스터디 발표 자료, 내 지적을 들으면서 급여가 적고, 파트타임이어도 상관없으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받으면 좋겠다고 반응이 바뀐 것도, 지난 몇 년간 콘텐츠에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자기애일까?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자기 성장에 충성해야
얼마 전 탄핵을 당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2021년에 했던 표현으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는 발언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내가 직원들에게 하는 이야기, 심지어 SIAI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충성할 대상은 회사나 학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콘텐츠, 그 콘텐츠를 빛나도록 해 주는 구조여야한다.
언론사 쪽으로 가면, 기자들에게 이미 보통 수준의 인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레벨의 기사 방향성을 뽑아주는데, 그걸 본인이 소화만 잘 하면 어디가서 단순히 A급 기자 수준이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공부하고 왔길래 이런 기사를 쓰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다. 그걸 느낀 인력들은 자기가 맡은 기사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에 뽑아준 방향성도 읽어보고, 혼자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몇 달 안에 쑥 성장해 있다. 반대로, 월급 한 푼 더 받으려는 생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콘텐츠는 읽다가 화가 나니, 더 화를 낼 게 아니라 조용히 집에 보내버린다.
얼마 전에 영어권에서 교수들 기고글을 우리 The Economy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업무로 인력을 뽑다가, 함량 미달의 결과물을 자꾸 내서 내보냈던 직원한테도 같은 말을 했었다. 내 눈 높이, 우리 조직의 눈 높이를 맞추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네가 얼마나 잘 하고 싶은지, 그래서 이걸 발판으로 어떻게 커리어를 쌓아나갈지를 고민해야 우리도 너를 데리고 있을 수 있다는 거였다.
SIAI 학생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나한테 합격, 통과 점수를 받는 것이 당장은 급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 학생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내가 인정하는 A급 인재들 사이에서 눈이 휘둥그래지는 반응이 나오고, 동양인이라고, 처음 들어보는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도록 도와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논문이 잘 나오도록 학생을 괴롭히는 것이 딱히 즐거운 일도 아니고, 시간적으로 봤을 때는 매우 귀찮은 일이지만, 이렇게 해 줘야 그 학생이 어디가서 당당하게 학위 교육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퀄리티 게임을 할 수 있는 인력들만 모여야
박사 지원할 때 쓰는 SoP에 항상 너네 학교가고 싶다는 표현을 쓸 게 아니라, 내가 뭘 하고 싶은데 너네 학교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너네 학교도 내가 이런 연구를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쓰라고 주의를 듣는다.
말을 바꾸면, 지원자와 학교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있을만큼 그 학교의 그 박사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걸 잘 보여주라는 뜻이다. 물론 지난 몇 십 수 년간 인생을 살면서 그 SoP가 실제 입학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SoP를 쓰는 철학 만큼은 잘 지켜져야 박사 과정에 입학하고, 교수들의 지원 사격을 받고,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도 함께 얻게 됐다.
그리고 작게 나마 대학을 설립해서 조금씩 키워보니, 하버드가 영국 옥스브릿지에 밀리던 설립 초기 300년간 프로테스탄트들 신학 학교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판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외 미국의 주요 대학들이 수학 학원(Caltech), 기계 학원(CMU), California? 거기도 대학이 있나(Stanford) 등등의 멸시를 받다가 어떻게 설립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올라섰는지를 역사를 추적해보면서, 다들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끌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는지 알게 됐는데, 지난 몇 년간 내가 한국에서 했던 것이 본의 아니게 같은 전략을 쓴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예전에 TA를 하던 한 학생이 외부에 SIAI의 역량을 보여주려는 건 알겠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들이 너무 어려운 공부를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 섞인 불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들이 다들 이런 성장통을 겪었더라.
며칠 전 Case study 발표를 했던 한 학생이 자기가 만든 모델에 대한 확신을 갖고 내 공격을 계속 방어했었는데, 발표가 끝나고 난 다음에 위의 스크린 샷에 나온대로 메세지를 보냈다. 국민 여론을 하나의 분포함수로 잡고, GMM이 작은 정규분포 함수 여럿의 결합이 대형 분포함수가 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걸 빌려서, 좌파, 중도, 우파를 구분하는 정규분포들을 만들어서 선거 중 사전투표 후 분포함수 변화를 해석하는 논리를 쌓은 모델이었는데, 아이디어도 좋고, 논리의 흐름도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Toy model의 한계 탓에 설명이 꼬이는 부분을 지적하는 거에 계속 반박을 하더라.
너무 강하게 반박했나 싶어서 머쓱했나본데, 저 메세지를 받고 거꾸로 내 입장에서는 왜 틀렸는지,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하는지 명확하게 전달을 못해줘서 미안했을 따름이다. 아마 내가 정확하게 지적을 잘 해 줬으면 바로 오해가 풀리면서 본인의 모델을 수정했을 것이다. 저 발표가 길어지고 학생이 목소리를 높인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저 그룹 학생들의 Case Study 발표와 위의 대화를 번역해서 이번 출장 중에 이곳저곳에 보여줬는데, 다들 내 깐깐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교육 과정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으면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는 안심하는 반응도 읽을 수 있었다. 다들 했던 이야기가, 교육은 이제 완성됐으니 남은 건 어떻게 포장해서, 어느 고객들에게 어떻게 수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푸는거라고 논의의 주제를 옮기더라.
초A급 인력만 뽑으시는 것 같아서 지원했었어요
유럽 모 처에서 대학원 공부하는 중에 GIAI Korea 산하의 어느 언론사 업무에 지원하셨던 분이 한국에서 쌓은 경력도 엄청난데 굳이 왜 이렇게 작은 조직에 지원했었냐고 물으니까, 업무가 꼭 하고 싶었고, 그 업무가 자기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기준 못 맞추는 인력들은 내보내고 알짜 인력만 뽑으신 이야기를 보면서, 초A급 인력만 뽑으시는 것 같아서 지원했었어요
라고 그러시던데, 앞으로 조직 운영도, 이런 관점을 가진 분들이 올 때만 조직을 키울 생각을 하고, 그게 아니면 그냥 사업 욕심을 버리고 조용히 작은 사업만 하거나, 아니면 자동화 시스템을 내가 직접 만들어서 돌리는 걸로 인력을 대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닌 인력을 뽑으면 너무 많은 비용을 HR에 써야 한다. 인력 돌려서 수익도 안 나는 나라에서.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젊은 시절에 면접 대기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 통에 집어넣는 인력들 위주로 채용을 결정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이병철 회장이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 출신인 걸로 거래 상대방의 고까운 자세를 무력화시켜버리던 이야기를 매번 해주시고, 실제로 삼성그룹 초기에 함께 계셨던 분께 직접 들은 이야기인만큼, 신빙성이 굉장히 높은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삼성그룹도 사업 초창기에 회사 조직의 파워가 아니라 창업자의 유학 스펙 하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기업이었는데 그걸 극복했구나는 생각도 들었고, 인력 채용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다가 결국에는 사무실 정리 정돈, 청소 같은 사소한 것 하나에서 지원자의 성실성과 근면성, 책임감을 짐작하며 인력을 채용했던 창업자의 고민도 함께 읽을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내 무능력으로 책임감과 자기 성장을 위한 노력을 붓는 인력을 많이 못 찾은건지, 아니면 정말로 지난 수십 년 사이에 한국 노동 시장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글로벌 1류 기업으로 올라서는 기초를 만든 창업자도 같은 고민을 했었던 걸 보면서, 또 '초A급 인력만 뽑으시는 것 같아서 지원했었어요'라는 분의 반응을 들으면서, 조직 성장의 근본은 초A급 인력과 그들의 성실, 근면, 책임감에 있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