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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유정범 전 메쉬코리아 의장의 해임을 규탄하는 시위가 에치와이 앞에서 열렸다. 메쉬코리아는 지난 2월 자금난에 빠진 이후 유정범 전 의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지분을 담보로 단기 브릿지 론으로 자금을 융통해왔으나 결국 자금난을 해결하지 못했다. 지난 1월에 hy(에치와이)에서 유상증자 800억원을 통한 신주발행으로 67%의 지분을 인수하기로 한 뒤, 차례로 기존 이사진이 해임되는 중이다.
시위 관계자는 유정범 의장의 해임이 부당한 절차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과 hy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메쉬코리아를 헐값에 인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여 명의 참가 인원은 대부분 메쉬코리아 관계자와 메쉬코리아가 운영하는 부릉의 라이더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부릉 유니폼은 평소 입던 옷이 아니라 새 옷인 것처럼 외부 환경에 노출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내 인생 12년 바친 "부릉"'
'내 인생 12년 바친 "부릉"'이라는 피켓 문구대로 유정범 전 의장은 12년의 인생을 바쳐 기업가치 1조를 넘보는 대형 스타트업을 성장시켰다. 지난 2021년에는 무려 1,002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하기도 했다. 당시 투자사들의 요청은 쿠팡 방식으로 '라스트 마일' 공급 시장에서 선두 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물류센터를 확대하고, 이륜차 기반의 라이더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지점 확보에 추가금을 쏟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학교 폭력 중에 500원 주면서 10,000원치 빵 사 오라는 농담'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며 "쿠팡은 3조도 모자라 1조 추가 투자가 들어갔고, 다시 상장 후 수십조원이 투입되어 겨우 브레이크-이븐(Break-even, 손익분기점)을 지났다"는 점을 비교 대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1천억원으로 수도권의 라스트 마일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영진이 이렇게 투자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동안 회사의 자금 사정은 급격히 어려워졌다. 최저임금 상승, 유류값 인상 등으로 라이더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금액은 점점 커졌고, 배달 서비스 시장 경쟁은 더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 전 의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추가 투자금을 확보할 수 없으면 성장보다 안정화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고민을 2021년의 대규모 투자를 받던 기간 내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00원 주면서 10,000원치 빵 사 와라'
무리한 요구를 반복했던 투자사들은 모든 책임을 유 전 의장의 경영 실패로 덮어씌운 채 hy에 매각하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메쉬코리아 사정에 정통한 한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현재 벤처투자업계 전반적으로 "자기들도 옷 벗어야 할 판국인데 책임지려 할 이유가 없다"며 "투자금 일부라도 건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12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쏟아부어 키워놓은 회사를 헐값으로 넘기는 데 분노했던 유 전 의장과 벤처투자사간의 그간 분쟁도 이번 매각 및 유 의장 해임의 또 다른 원인이다. 투자사들은 지난 2019년부터 유 의장의 학력 위조 등을 문제 삼으며 명예로운 퇴진을 요구했고, 당시 메쉬코리아 경영진들은 투자사들이 경영을 독단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회사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투자 라운드가 계속되며 신규 투자금이 들어올 경우 기존 경영진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경영진이 교체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직원들에게 폭언한다는 이유로 해고되기도 했고, 최근 넷플릭스의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도 회사를 떠났다. 국내에서도 투자사의 압력으로 대표가 교체되는 스타트업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학력 위조 및 라이더들과의 분쟁 등으로 내부 논란이 있기는 했으나, 지난해 초 OK저축은행으로부터 브릿지론으로 350억원의 대출을 받기 전까지는 경영진이 합심해서 회사 성장에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22년 내내 투자자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창업 경영진 사이의 불만이 가시화됐고, 결국 김형설 신임 대표와 유정범 전 의장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골이 생기게 됐다.
hy 인수, 창업가 신화의 종말?
벤처 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벤처 업계 전반적으로 유 전 의장이 '투자사의 계략에 회사를 '뺏겼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시위 중 피켓의 문구에 나온 '대한민국 창업 생태계 죽인다!'는 표현이 벤처 업계가 현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을 잘 요약해놓았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투자 시장이 어려워지며 스타트업들이 '을'이 된 탓에 투자자에게 많은 요구를 하지는 않고 있으나, 반대로 많은 스타트업 창업자가 가능하다면 '스타트업 부트스트래핑(Bootstrapping)'을 고민하게 된 사건이 되기도 했다.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틴다'는 뜻으로 외부 투자를 받다 간 결국 회사를 탈취당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 내 급하게 회사를 성장시키려다가 무리한 요구에 결국 경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는 위험을 택하기보다, 매출액이 나올 수 있는 영역에 좀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지난 9일 중소벤처기업부는 '유니콘', '예비 유니콘' 등의 표현으로 투자받은 스타트업이 기업가치 1조원에 도달하는 사례가 무려 22곳이나 된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옐로 모바일 등 실제 사업을 접은 사례나 쏘카, 컬리, 오아시스 등 벤처투자사에서만 1조원 이상을 인정받았을 뿐, 현재 장내·외 거래 시장에서 7~8천억원에 거래되고 있는 스타트업들도 많아 '속 빈 강정'이라는 비난을 받는 중이다. 투자자 놀음에 외형만 부풀려졌을 뿐, 실제 내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는 비난이 가시화되고 있는데다, 이번 메쉬코리아 사태로 창업가들은 더더욱 투자에 두려움을 갖게 됐다.
창업가 보호가 투자자 보호?
쿠팡이 '황금주(Golden Stock·1주의 투표권을 100주 이상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를 인정해주는 미국 시장에 상장을 결정했듯이, 창업가가 외부 투자와 별개로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메쉬코리아 사태에서 보듯 무리하게 인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회사 내부에 크게 분쟁이 생긴 탓에 정상화에 장기간의 시간을 쓸 수밖에 없는 만큼 인수한 hy 입장에서도 원하지 않는 상황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hy 측 내부 사정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직원들은 부릉 관계자들이 이미 여러 차례 건물 앞에서 시위한 탓에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y 사옥으로 들어가던 한 관계자는 사옥 앞의 시위 피켓을 한참이나 쳐다보기도 했다.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 정통한 한 전직 IB 업계 출신 관계자는 "보통 인수전 중의 시위는 합병 위로금을 더 달라는 노조의 전략"인 경우가 많으나, 이번 메쉬코리아 사태는 "자본가와의 싸움에서 밀려난 창업가의 마지막 저항"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한 벤처 스타트업 대표는 사업 초기에 이미 투자금을 전액 갚고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투자자 논리에 기업 경영이 망가지는 것이 불편했다고 밝혔다. 이어, "투자금을 끝까지 안 받겠다고 고집 피우는 스타트업이 알짜 스타트업이라는 시선이 생겨서 좋다"며 "사실은 이런 문화가 있어야 투자자들도 믿고 투자할 수 있으니, 부트스트래핑 문화가 결국은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