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EU 글로벌 게이트웨이, 규모 경쟁 대신 신뢰로 돌파해야
입력
수정
중국 일대일로, 경쟁국의 인프라와 외교 영향력 잠식 EU 글로벌 게이트웨이, 규모 경쟁보다 지속성과 신뢰가 관건 신뢰 확보의 열쇠는 투명성 강화와 현지 인력 양성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BRI)는 해외 인프라 투자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막대한 자금과 빠른 추진력을 앞세워 참여국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기존 경쟁국의 입지가 약화됐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따르면, 일대일로 참여국에서 일본의 해외 인프라 프로젝트는 369건(41%) 줄어 약 120억 달러(약 16조8,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캄보디아, 중국, 몽골, 태국, 인도네시아가 대표적 사례다. 외국 정상의 일본 체류 일수도 누적 463일(42%) 감소했다. 인프라 외교에서 입지 상실의 대가가 수치로 확인된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유럽연합(EU)은 대외 인프라 전략인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를 추진하고 있다. 2027년까지 3,000억 유로(약 450조원)를 투입한다는 계획이지만, 중국의 공세와 비교하면 여전히 격차가 크다. 중국은 2000년 이후 해외 프로젝트에 1조3,000억 달러(약 1,820조원)를 집행하며 사실상 세계의 긴급 대출 창구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유럽의 성패는 단순한 자금 규모가 아니라 운영의 지속성과 제도적 신뢰에 달려 있다.

자산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
인프라 경쟁의 본질은 건설 규모가 아니라 운영 안정성에 있다. 전력, 교통, 통신망이 차질 없이 가동되고 이를 현지 인력이 직접 관리할 수 있어야 파트너국은 신뢰를 갖는다. 중국이 속도와 자금 동원에서 우위를 가진다면, 유럽은 안정성과 제도적 투명성으로 차별화할 수 있다.
최근 일대일로 대출이 둔화되고 구제금융이 늘면서 차입국들은 단기 자금보다 지속 가능한 자산을 원하고 있다. 글로벌 게이트웨이가 각 프로젝트에 기술 인력 양성, 유지 관리 재원, 투명한 계약 구조를 결합한다면 단순한 건설 지원이 아니라 장기적 신뢰를 제공하는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글로벌 게이트웨이의 현주소
EU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보조금, 유럽개발은행 대출, 유럽지속가능개발기금플러스(EFSD+) 보증을 주요 수단으로 2027년까지 최대 3,000억 유로(약 450조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보증 한도를 530억 유로(약 79조원)로 제시했지만, 유럽회계감사원(European Court of Auditors)은 출범 당시 실제 규모를 391억 유로(약 59조원)로 평가했다. 즉, 현금 지원보다는 민간 투자를 끌어내는 방식이 중심이다.
프로젝트도 확대되고 있다. 집행위는 2023년 90개 사업을 발표한 뒤, 2024년 말까지 134개로 늘렸고 2025년에도 46개가 추가됐다. 이 중 절반은 아프리카에 집중돼 있으며, 전체 1,500억 유로(약 225조원)가 그 지역에 투입될 예정이다. 다만 분야별로는 에너지와 교통이 대부분이고, 교육과 연구는 10% 미만에 그친다. 인적 자본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장기적 성과를 확보하기 어렵다.
중국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2000년부터 2021년까지 165개 저·중소득국에 1조3,400억 달러(약 1,876조원)를 공급했고, 같은 기간 긴급대출과 통화스와프를 합쳐 1,700억 달러(약 238조원)를 지원했다. 다만 신규 대출이 줄고 기존 채무 상환 부담이 늘면서 차입국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 이 상황은 유럽에 도전인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주: 항목- 총자금 동원 규모, EFSD+ 보증 역량, 아프리카 투자 패키지(X축), 금액(Y축)
일본의 경험에서 얻는 교훈
일본은 2015년 ‘고품질 인프라 파트너십’을 출범시키며 일대일로에 맞섰다. 5년간 1,100억 달러(약 154조원)로 시작해 2,000억 달러(약 280조원)로 확대했지만,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일대일로 참여국에서 일본의 인프라 프로젝트는 급감했고 정상 외교도 위축됐다. 단순히 품질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쟁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속도와 외교적 가시성이었다.
EU 글로벌 게이트웨이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기준은 유지하되 속도를 높여야 한다. 착공 전 단계에서 토지 확보, 연결 인프라 준비, 환경 인허가 등 필수 절차를 사전에 마무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럽팀(Team Europe) 협업도 효과적이다. 태양광 발전소, 변전소, 물류 거점, 전력망 보강, 농촌 광섬유망처럼 반복 가능한 사업에 표준 조건을 적용하면 조달 절차를 단축할 수 있다. 금융 종결과 첫 전력 공급 같은 핵심 단계에 보증을 연계하고 일정을 공개하면 신뢰도 제고가 가능하다.
남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루비토 구간은 이를 시험할 수 있는 사례다. EU가 앙골라·콩고민주공화국·잠비아를 잇는 물류망을 개선하고 현지 인력을 체계적으로 훈련한다면, 단순 지원자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주: 대체 효과(X축), 항목-외국 정상 방문 일수 변화, 외국 정상 방문 일수 변화율, 프로젝트 절대 변화, 프로젝트 수 변화율(Y축)
투명성과 인적 자본이 만드는 신뢰
신뢰 확보의 또 다른 조건은 투명성이다. 유럽회계감사원(European Court of Auditors)과 주요 연구 기관은 글로벌 게이트웨이가 재원 집행과 성과 관리에서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해 왔다. 각 사업별 재원 구조와 집행 과정을 공개하면 파트너국의 신뢰는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인적 자본 투자도 병행돼야 한다. 현재 교육과 연구는 전체 사업의 10%에도 못 미친다. 단순히 시설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 인력이 발전소와 교통·통신망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야 한다. 기술 훈련과 자격 인증을 체계화하면 운영 안정성이 높아지고, 이는 곧 유럽의 장기적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결국 글로벌 게이트웨이의 경쟁력은 단기 자금 투입이 아니라 장기적 지속 가능성이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인력 양성이 그 출발점이다.
지속성을 통한 돌파구
일본의 경험은 유럽에 경고라기보다 전략 전환을 요구하는 신호다. EU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단순한 자금 규모 경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핵심은 인프라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파트너국이 신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앞으로 2년 동안 일부 핵심 사업에서 교육과 유지 관리 체계를 자금과 계약 조건에 반영해야 한다. 일정과 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현지 인력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할 때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지속 가능한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유럽이 내세워야 할 경쟁력은 규모가 아니라 안정성과 신뢰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 Global Gateway Needs an Education Core to Beat Goliath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