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셧다운’을 정치 무기로, 약달러·대량해고 시나리오 현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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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임시 지출법안' 부결, 7년 만에 셧다운 ‘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 두고 여야 ‘평행선’ 트럼프 “민주당이 원인” 연방 공무원 감원 경고

미국 연방정부가 7년 만에 문을 닫았다. 연방의회의 예산안 처리 불발로 자금이 끊기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셧다운(Shutdown)’ 사태를 대규모 감원과 약달러·금리인하 환경 조성을 위한 정치적 기회로 삼는 분위기다. 연방 부채 탕감을 위한 공무원 해고와 금리인하 모두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던 시나리오다. 또한 연방정부의 문이 닫힌 순간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아젠다는 오히려 더 힘을 받고 있다. 국경 단속과 무역 관세 등은 필수 기능으로 남겨둔 반면, 민주당 지역구 프로젝트 예산은 셧다운을 명분으로 줄줄이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민주당은 트럼프 행정부에 이득이 집중되는 구도를 좌시하지 않고, 초단기 예산안 추진과 단일대오 전략으로 반격에 나서고 있다.
1일 0시 1분부터 셧다운 돌입
1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연방정부 업무 일부가 일시 정지되는 셧다운이 1일 오전 0시 1분을 기해 시작됐다. 셧다운 사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1월 20일) 이후 처음이며, 트럼프 집권 1기 때인 2018년 12월(개시 시점 기준) 이후로는 약 7년 만이다.
이번 셧다운은 연방정부의 2025회계연도 최종일인 지난달 30일 자정까지 의회에서 2026회계연도 예산안 또는 단기 지출 법안(임시예산안·CR)이 처리되지 않아, 정부를 운영할 새로운 지출에 대한 법적 권한이 사라지면서 맞게 됐다. 미 상원은 셧다운을 피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7주짜리 공화당의 임시예산안(CR)을 표결(가결 정족수 60표)에 부쳤으나 찬성 55 대 반대 45로 부결됐고, 민주당이 자체 발의한 CR 역시 표결에서 부결됐다.
정가에서는 이번 사태를 예고된 파국으로 보고 있다. 그간 공화당과 민주당은 연방의회에서 예산안 처리가 불발된 핵심 쟁점이었던 건강보험 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공방을 벌여 왔다. 앞서 여당인 공화당은 지난달 19일 하원에서 기존 지출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클린(clean)’ CR을 통과시켰지만, 같은 날 상원에서 민주당의 반대로 인해 법안 최종 통과가 무산됐다. 민주당은 올해 말로 종료되는 공공의료보험 ‘오바마케어(Affordable Care Act·ACA)’ 보조금 지급 연장 등을 요구하며 공화당이 주도하는 CR에 반대하고 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여야 의회 지도부가 셧다운 발생을 이틀 앞둔 지난달 29일 백악관에서 회동했지만, 결국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셧다운 첫날에도 미 상원이 사태 중단을 위해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낸 CR 처리를 시도했으나, 모두 부결됐다. 이에 따라 다음 재표결이 이뤄지는 이틀 뒤까지 일단 셧다운은 지속될 전망이다.
셧다운은 재정 지출에 대한 의회의 통제를 규정한 ‘적자재정방지법(Antideficiency Act)’에 따른 것이다. 셧다운 상태에서는 연방정부 자금이 집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법 집행, 국경 수비, 핵심 복지 등 일부를 제외한 상당수의 정부 기관 활동이 추가 예산 승인 때까지 중단된다. 연방공무원들에 대한 급여 지급도 중지돼 공공 안전 등 필수 분야 직원은 무급으로 근무하고 비(非)필수 분야 직원은 무급 휴직 상태가 된다. 군인, 연방 법 집행관, 항공교통 관제사, 교통안전국(TSA) 요원, 공공병원 직원 등 활동 근로자의 급여도 셧다운 해소 뒤 소급해서 제급된다.

셧다운이 대량해고·금리인하·약달러 ‘찬스’로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을 민주당에 떠넘기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셧다운을 자신의 국정 과제를 실현할 기회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취임 직후부터 감세 공약 이행을 위해 정부 구조조정을 추진해 왔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의 추산에 따르면 사실상 일시 해고인 무급 휴직에 들어가는 연방 직원 수는 7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안 그래도 공무원 대량 해고를 추진해 온 트럼프 대통령은 셧다운을 기회로 더 많은 해고를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민주당이 셧다운을 원한다”며 “셧다운이 되면 해고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해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셧다운 사태를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다. 실제 백악관은 지난주 정부 폐쇄 시 해고 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지시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우선순위에 맞지 않는 자리를 영구적으로 없애는 내용의 광범위한 감원 대상이 적시된 것으로 전해진다.
셧다운 이후 발생한 달러 약세도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강조해 온 '약달러 정책'과 맞닿아 있다. 1일 6개 경쟁 통화와 비교하는 달러인덱스는 엔화 대비 0.2% 하락한 97.54에 거래됐다. 지난달 24일 이후 최저치다. 이로써 달러인덱스는 올 들어 10% 하락했다. 이는 14.6% 하락한 2003년 이후 22년 만에 가장 큰 하락 폭으로, 미 연방정부의 셧다운으로 인해 자본시장에서 미국의 신뢰가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반영됐다.
달러 약세는 한동안 이어질 공산이 크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연내 2차례 금리인하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1일 발표된 민간 고용 지표인 ADP의 일자리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달 민간 부문 고용은 3만2,000개 감소했다. 시장 예상치인 5만 개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으로 민간 고용이 급격히 둔화된 모습이다. 이에 기준금리 선물이 거래되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는 연준이 10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0.25%포인트 인하할 확률을 99%까지 반영했다. 국제 자본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연준의 금리인하는 대표적 달러 약세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약달러와 금리인하 모두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 일치한다.
국경 순찰과 이민세관단속국(ICE) 등 핵심 이민 단속 기능은 차질 없이 계속되게 한 점도 트럼프 대통령이 셧다운을 사실상 기회로 활용하고 있단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특히 ICE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국정과제이자 지난 7월 제정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BBBA)'을 통해 이미 예산이 책정돼 셧다운 영향이 제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도 방해받지 않을 전망이다. 과거에 무역은 대체로 필수적이지 않은 기능으로 분류됐지만, 이번에 상무부와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 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셧다운 계획에서 밝혔다.
민주당 ‘플랜B 작전’ 초단기 예산안 카드, ‘단일대오’ 요구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민주당은 셧다운 직후 쓸 초단기 예산안을 기획하는 등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정부 운영을 셧다운 직후 7∼10일 내에 재개하기 위한 초단기 예산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플랜B’로 불리는 이 방안은 공화당이 고수하는 7주짜리 CR 전략을 무력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초단기 예산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 통과되는데, 공화당 의원 중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정부 재개를 거부했다”는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슈머 원내대표의 전략은 존 튠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등 공화당 지도부의 시간 끌기 전술을 꼬이게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민주당은 셧다운 직후 최소한의 기간만 운영권을 확보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계산이다. 오바마케어 외에도 양당은 재정적자 관리 문제, 국방비와 사회복지 지출 배분 등에도 이견 폭이 크다. 공화당은 장기 임시예산으로 시간을 벌어 이후 협상을 이어가려 하고, 민주당은 단기 예산안을 통해 공화당을 압박하려는 구도다.
일부 민주당 의원은 셧다운 장기화를 감수하더라도 트럼프 정부에 물러서선 안 된다며 의원들에게 단일대오를 요구하고 있다. 셧다운이 장기화하면 여론이 결국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돌아설 것이란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피트 아길라 민주당 하원의원(캘리포니아)은 “뉴욕 인프라 사업 예산 보류로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민심이 돌아설 것”이라며 “이는 다음 달 치러지는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방 공무원들이 많이 사는 버지니아주의 마크 워너 민주당 상원의원도 “이들은 우리(민주당)가 반격하길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 주지사들은 과거 시민 불편을 줄이기 위해 셧다운으로 중단된 업무에 주 예산을 투입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지원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는 1일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인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였던 자유의 여신상 횃불이 이번에는 말 그대로 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였던 2018년 셧다운 당시 수천 명의 관광객 불편을 줄이기 위해 일시 폐쇄된 자유의 여신상을 뉴욕주 예산 지원으로 재개장한 것과 대조적이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트럼프식 국정 독주에 견제장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민주당이 이번 만큼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