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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거시경제 악화 및 미 연준의 금리 인상에 따라 미국 달러당 원화 가치가 치솟으면서 국내 외화보유액이 감소 추세에 접어들자 일각에서는 금융 위기 도래와 같은 우려와 함께 통화스와프를 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한국은행은 ‘외화 유동성커버리지 비율’ 분석을 통해 국내 외화 유동성은 여전히 충분하다고 선을 그었다.
수치상으로는 ‘외화 부족’
한국은행이 5일 내놓은 ‘외환보유액 통계’에 따르면 지난 5월 중 국내 외환보유액 규모는 4,209억8,000만 달러로 전월 말 대비 57억 달러 감소했다. 올해 들어 미 연준의 금리 인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기대 및 달러화 약세 기조에 국내 외화자산 운용수익이 증가하면서 올 3월 이후 두 달 연속 외환보유액이 증가하는 듯했으나, 이번에 다시 급감세로 돌아선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감소세에 들어선 건 2009년 글로벌 위기 이후 14년 만에 처음 발생한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들은 최근 하락하고 있는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을 그 근거로 든다.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외화 Liquidity Coverage Ratio, 이하 ‘외화 LCR’)은 30일간의 외화순현금유출액(이하 ‘순현금유출액’)을 감내할 수 있는 외화 고유동성자산(이하 ‘고유동성자산’)의 비율을 뜻한다. 이는 금융 당국이 은행의 외화 유동성 충격에 대한 대응능력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규제지표로, 외화 LCR이 2023년 들어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는 만큼 국내 외환자금시장의 사정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외화 LCR은 제도 도입 시기인 2017년 이후 2022년 11월 142.6%까지 상승했다가 올해 4월 124.7%로 상당폭 하락했다. 이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 A씨는 “최근 이같은 트렌드는 외화 LCR의 분자에 해당하는 고유동성자산이 줄어든 결과”라며 “국내 은행 전반의 외화 보유 건전성이 악화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했다.
외화 LCR, 제대로 해석해야
그러나 전문가들은 외화 LCR의 하락이 반드시 은행 외화자금 사정의 악화를 의미하지는 않음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한국은행 국제국 외화건전성조사팀의 이지혜 과장은 “외화자금 조달 여건에 변화가 없더라도 은행이 외화자금을 적극 운용할 경우 외화 LCR이 하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수치상의 하락만 보는 것이 아닌, 외화 LCR의 변동 요인을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은행은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의 통화정책 정상화에 대비하기 위해 2022년 상반기까지 외화채권 발행을 선제적으로 크게 늘렸다. 2022년 하반기 들어서는 미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따른 외화예금 금리의 상승,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 원/달러 환율의 변동성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 중심의 외화예금이 빠르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2022년 기준 은행의 외화 유동성도 상당히 여유로웠다. 국내은행은 이같은 풍부한 유동성으로 주로 고유동성자산인 주요국 국채 투자와 지급유치금 예치금을 크게 확대하면서 외화 LCR을 정점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한편 올해 들어 미 연준의 금리 인상 기조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미 달러화 강세도 한풀 꺾이는 추세가 시작되자 기업들의 외화예금 인출도 증가했다. 또한 지난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크레디트스위스(CS) 사태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국내은행의 외화자산이 크게 축소됐고, 이를 타 기관 외화예치금 회수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현금유입액이 감소하면서 외화 LCR의 분모에 해당하는 순현금유출액이 증가됨에 따라 외화 LCR이 하락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러한 기조에 국내은행이 ‘외화 유동성’의 핵심인 고유동성자산을 처분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지혜 과장은 “2023년 들어 국내은행이 외화자산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고유동성자산이 아닌 외화예치금 인출로 대응하는 것이 수익성,안전성 측면에서 더 올바른 판단”이라며 “낮은 리스크에 높은 이자를 수취할 수 있는 미 연준 지급준비금(고유동성자산)을 줄이는 것보다는 타 기관 외화예치금을 줄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밝혔다.
불안하면 통화 스와프?
달러 강세 기조가 이어지면 항상 뒤따라오는 이야기가 통화스와프다. 통화스와프란 두 나라 간 자국 통화를 상대국 통화와 맞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환율을 둘러싼 심리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외화보유액 마저 감소하고 있으니 일각에서는 ‘유동성 공급장치’인 달러통화스와프를 체결해야 한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통화스와프는 과한 조치라는 분위기다. 외화보유고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세계적인 추세에 해당하며, 한국의 경제 펀더멘탈이 충분히 탄탄하기 때문에 과거 IMF와 같은 재앙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5월 24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3년 1분기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올 1분기 순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부채)는 7,730억 달러로, 세계 금융위기였던 2008년 말 순대외금융자산이 -703억 달러였음을 비교하면 여전히 견고한 외화 자산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앞서 살펴봤듯 외화 LCR에서 유동성의 핵심인 ‘고유동성자산’은 변동이 없는 만큼 과도한 우려는 내려놔도 된다는 분석이다.
지난 1997년 참혹함을 겪었던 우리 국민들이 외환위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만큼 외환위기에 대한 과도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언론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단순한 수치 제시을 넘어, 외화LCR을 구성하는 변수는 무엇인지, 나아가 어떤 경제적 배경이 해당 산식의 변동을 견인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 우리나라 건전성을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