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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분기에도 미국 벤처캐피털(VC)의 투자 혹한기는 계속됐다. 특히 투자금 회수 단계(Later-Stage) 벤처·스타트업의 어려움이 지속되자, 기관투자자(LP)들의 자본이 묶이면서 투자자들의 경계심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지난해 3분기부터 거래 감소세 둔화와 일부 기업의 가치가 상승하는 등 회복의 조짐도 드러나고 있다.
미국 벤처투자 시장도 여전한 혹한기
벤처 투자 정보기업 피치북(Pitchbook)이 미국 벤처투자 시장에 관한 보고서 ‘Dealmaking decline levels off: US VC trends in 5 charts’를 14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미국 벤처 시장은 전반적으로 베어마켓 상황에 놓여있으며, 자금조달이 어려워진 VC들이 옥석 가리기에 나선 것으로 분석됐다.
먼저 올해 1분기 미국 전체 VC 투자 규모는 370억 달러(2,856건)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1분기 825억 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투자금 회수 단계 VC 펀딩 또한 7분기 연속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엔젤 및 시드 단계 등 초기 단계(Early Stage) 펀딩도 10분기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만 전체 VC 투자 규모의 감소세는 일정 부분 거래량이 안정되면서 둔화되고 있는 걸로 나타났다.
한편 VC업계는 소프트웨어 등 기술 기업에 대한 매력도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엑셀스타 벤처스(Excelestar Ventures)의 공동 대표 타스넴 도하드왈라(Tasneem Dohadwala)는 “지난해보다 투자 유치가 더욱 어려워진 시장 환경이다. 특히 B2B 기술 스타트업들에게 혹독한 시기”라며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은 글로벌 경기 둔화가 가속되는 시장 상황에서 기술 기업에 대한 가치평가를 평소보다 낮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투자는 지양, 허리띠 졸라매는 VC들
올해 1분기 5,000만 달러 이상의 대규모 펀딩을 받는 투자금 회수 단계 스타트업은 총 55개로, 전체 투자 규모의 약 7.7%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해 평균 14.6%와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규모로 올해 말까지 5,000만 달러 이상의 대규모 펀딩을 받은 스타트업들의 수가 지난해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대규모 펀딩으로 유명한 미국의 시드 액셀러레이터 와이 콤비네이터(Y Combinator)는 올해부터 투자금 회수 단계 기업들에 대한 펀딩을 종료하고, 성장 단계(Growth Stage) 기업들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1년 높은 상승세를 보였던 메가딜(1억 달러 이상의 벤처 거래) 투자도 지난해 중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올해 1분기 초기 단계에서 18개, 투자금 회수 단계에서 19개, 성장 단계에서 13개의 메가딜이 성사되며 지난 2020년 규모로 하락했다.
사실 지난 분기 벤처에서 가장 큰 메가딜은 미국 전자지급 결제대행(PG) 기반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Stripe)의 65억 달러 시리즈 I 투자였다. 그러나 지금 시장 상황으론 스트라이프가 다음 라운드 투자까지 성사할 것으로 예측하는 전문가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스트라이프의 기업 가치는 2021년 3월 950억 달러의 평가에서 450억 달러로 반토막 난 상황이다.
특히 올해 1분기 후기 단계 기업들의 자본 수요와 공급 비율이 사상 최고치로 급증했다. 다시 말해 이는 이들의 자금조달 여건이 매우 악화됐음을 의미하며, 피치북은 이들 기업이 필요한 자금 규모의 약 31% 정도만이 수급 가능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아울러 현재 219개의 기업이 IPO를 앞둔 가운데, 현금 소진이 빠른 스타트업들은 PE나 헤지 펀드와 같은 비전통적인 투자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혹한기에도 초기 단계 투자 인기는 여전
한편 초기 단계와 성장 단계 기업들의 상황은 좀 나은 편이다. 특히 VC들은 시드 단계 기업들만큼은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1분기 시드 단계 펀딩 규모는 약 300만 달러로 지난해 중간값 260만 달러를 웃돌았다. 투자 전 기업가치 평가(pre-money valuation) 또한 상승해 지난해 1,050만 달러보다 높은 1,3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러한 추세를 두고 피치북 분석가들은 “투자자들이 수익성 등 기업 분석을 좀 더 까다롭게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라고 설명하면서도 "최근 챗GPT 등으로 관심을 받으며 초거대 AI 분야에서 창업 중인 초기 단계 스타트업들의 등장이 비관적인 투자자들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고 분석했다.
시장은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올해 2분기 미국 VC 시장은 또 한 번 어려운 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VC 투자자들은 여전히 높은 시장금리와 악화된 경제 여건을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고수할 것이고, 인원 감축 등의 현재 포트폴리오 내 기업들에 비용 절감 압박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혹한기가 심화할 경우 미국 정부의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 강화를 고려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이 완화적 통화정책과 부양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결국 자금조달이 더욱 어려워진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고용을 줄이게 되고, 이는 다시 가계 전반의 소비를 위축시켜 결국 모두가 우려하는 경기 침체가 현실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비관론 속에서도 살아남는 스타트업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워렌 버핏의 말처럼 경기가 불황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진정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