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동남아가 기술 개발에 ‘목숨 걸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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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공급망, ‘아세안 중심 재편’ 중국 대신할 ‘프렌드쇼어링 대안’ 기술력과 교육 투자에 ‘성공 달려’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한 55%의 관세를 장기간 유지할 계획이라고 한 발언은 아시아의 경제 지도를 다시 그릴 만한 충격파다. 공급망 경로가 바뀌고 투자자들이 리스크를 재산정하는 가운데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과연 아세안(ASEAN)은 관세 충격을 기회로 활용해 미국, 중국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 ‘제3의 길’(third path)로 나아갈 수 있을까?

대중국 관세는 ‘동남아시아의 기회’
아세안의 기회는 이미 숫자로 보여지고 있다. 작년에 글로벌 해외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가 전년 대비 11% 줄어든 1조 5천억 달러(약 2,138조원)를 기록하는 상황에서 동남아의 2023년 해외 투자금 유입 규모는 2,300억 달러(약 328조원)로 기록을 경신한 바 있다. 아세안 국가 간 무역도 지역 전체의 22%를 차지해 글로벌 충격에 대비한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다각화’와 ‘확장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주: 글로벌(2024년)(좌측), 아세안(2023년)(우측)
작년 총 상품 가치 기준으로 2,630억 달러(약 375조원)를 기록한 디지털 경제도 빼놓을 수 없다. e-커머스, 핀테크(fintech), 온라인 서비스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조호르(Johor, 말레이시아 남부의 주)는 390억 달러(약 56조원) 규모에 해당하는 42개의 데이터 센터 프로젝트를 승인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대미 무역 흑자는 전자제품과 기계류 수출에 힘입어 멕시코, EU 등에 근접하고 있다.

주: 총 상품 가치 기준(좌측), 매출(중간), 수익(우측)
투자 흐름 유지할 ‘기술력 구축’이 관건
모두 글로벌 공급망이 동남아시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들이다. 모든 것은 각국 정부가 현재의 투자 흐름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기술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무엇보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55% 관세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가속화하고 있다. 기업들이 정치적으로 안정된 지역에 위치한 동맹국으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는 전략을 말하는데, 이는 아세안에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제시한다. 아세안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무역 구조에 있다. 역내 포괄적 경제 파트너십(이하 RCEP)은 아세안을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과 연결하는데 이들 국가를 합친 경제 규모가 글로벌 GDP의 30%에 달한다. 방대한 네트워크 덕에 동남아 국가들은 국가별로 생산 단계를 세분화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우호적 무역 동맹이 장기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경쟁 우위를 유지하려면 제품뿐 아니라 기술도 필요하다. 자격증과 단기 인증 과정, 기술 여권(skills passport)이 무역의 본질적 요소가 됐다는 말이다.
말레이시아가 올해부터 아세안 의장국을 맡으면서 기술 개발을 위한 정책이 힘을 얻고 있기는 하다. 최근 결성된 아세안 지경학 태스크포스(ASEAN Geoeconomics Task Force)는 경제 정책과 대외 전략의 조화를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공급망 업그레이드와 기술 개발을 결합하기 위한 역내 협약 논의가 진행 중인데, 궁극적인 취지는 해외 투자 및 역내 기준을 기술 개발과 훈련에 연결하는 것이다.
장기 경쟁력은 ‘결국 교육에서’
아세안이 시도하는 ‘제3의 길’이 성공하려면 교육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지역 우등생이라고 할 수 있는 싱가포르는 국제 학생 평가 프로그램(PISA) 수학, 읽기, 과학 영역에서 1위에 올라, 탁월함이 노력을 통해 가능함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아세안 전체로 보면 아직도 교육 수준이 고르지 않고 공공 예산도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비용 효율적이고 확장 가능한 실용적 전략이 요구된다. 가장 먼저 반도체, 전력 전자 장치(power electronics), 데이터 센터 등 산업 수요에 맞춘 역내 단기 인증 과정이 절실히 필요하다. RCEP 네트워크를 활용한 국가 간 실습 과정도 학생들이 생산 시설과 데이터 센터에서 실용적인 경험을 얻을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주요 프로젝트 투자자들에게는 교육 훈련에 대한 자금 제공을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 한마디로 교육을 ‘공동 시장화’하는 것으로 역내 어디서나 인정받는 자격증과 학점을 현실화하는 것이 골자다.
아세안이 국가별 차이와 예산 부족,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다수 회원국의 교육 예산이 OECD 기준을 밑도는 가운데, 수출 규제와 디지털 보안 문제도 협력에 위협 요소가 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아세안은 지금까지와 다르다. 역내 무역 규모가 충분하고 RCEP도 건재하며, 의장국인 말레이시아는 지경학적 전략을 정책에 녹여내고 있다. 미중 양쪽에 기울지 않고 실용을 선택한 접근 방식도 반드시 빛을 볼 것이다. 지역이 무역 인프라와 교육 인프라를 연결하는 데 성공한다면 제3의 길에서 그치지 않고 영구한 경쟁 우위 확보로 이어질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ASEAN Third Path: Turning a Tariff Shock into a Skills Strategy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