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가 원유 수출 중심의 기존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사업 다각화를 통한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 나선 가운데, 운용자산만 6,500억 달러(약 800조원)에 달하는 사우디 국부펀드(PIF·Public Investment Fund)에 빈 살만 왕세자의 '입김'이 지나치게 작용한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사우디 국왕이 승계한 직후인 2015년, 사우디 왕실에는 기존의 최고경제위원회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경제·개발위원회(CEDA)가 설립됐다. 새롭게 출범한 CEDA의 위원장을 맡은 이는 차기 왕권 계승자이자 당시 국방부 장관직을 겸임하던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Mohammed bin Salman Al-Saud, 이하 빈 살만) 왕세자로, 그는 2015년 3월 PIF 운용 권한도 획득했다.
2015년 9월 PIF 총재로 핵심 측근인 야시르 알 루마얀을 임명한 빈 살만 왕세자는 2019년 9월 사우디의 국영 석유공사 아람코와 광업공사 마덴의 회장으로도 알 루마얀을 임명하는 보상성 인사를 단행했다. 빈 살만 왕세자 측근의 기술 관료들로 구성된 PIF에 대해 외신들은 ‘왕세자 마음대로 주무르는 개인 은행’, ‘독자적 경제성장 의제를 지닌 왕세자만의 사우디’ 등 혹평을 하기도 했다.
'미스터 에브리씽'으로 불리는 빈 살만 왕세자와 알 루마얀 총재의 지휘하에 기존의 방향성을 재정립한 PIF는 2016년 4월 '사우디 비전 2030’을 추진하는 중심 기관이 됐다. PIF도 다른 펀드와 마찬가지로 사외이사가 포함된 투자위원회 등이 최종 투자 결정을 내리지만, 실세인 빈 살만의 무모한 베팅을 막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왕 직속이 되자 PIF는 투자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빈 살만 왕세자가 성장동력 다변화를 독려하면서 단기간에 글로벌 투자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투자 패턴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존 제조업이나 사회간접자본 위주에서 첨단기술 분야로 투자를 확대한 것이다.
네옴시티, 신기루일까 혁신일까
2017년 10월에 열린 제1차미래투자구상 회의에서 처음 공개돼 2019년에 정식 출범한 네옴시티 사업도 그 일환이다. 네옴시티는 2만6,500㎢(서울의 44배) 면적의 토지를 미래 지향적 설계를 통해 모듈형 스마트 시티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크게 자급자족형 친환경 직선도시 ‘더 라인’, 바다 위 팔각형 첨단 산업단지 ‘옥사곤’, 사막 위 스키장을 갖춘 친환경 관광단지 ‘트로제나’ 등 3개 프로젝트로 구성된다. 특히 네옴시티의 핵심인 더 라인은 외벽이 모두 거울로 만들어져 ‘미러 라인’으로도 불리며, 사우디가 2060년까지 탄소 중립과 탈석유를 표방하는 만큼 100% 친환경 에너지로 운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네옴 프로젝트에 대한 세계 언론의 반응은 냉담하다. 혁신적인 설계와 엄청난 규모로 인해 현실에서 구현이 불가능한 구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롯데월드타워(555m)와 맞먹는 높이의 고층건물들을 대규모로 짓는다는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지진, 풍압, 화재 등 재해에 대한 대비는 물론 건물 유지와 관리에 드는 비용 문제까지도 두루 고려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밝혀진 바가 없다.
일부 상층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햇빛이 들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며, 500미터 높이의 건축물에 테라스를 설치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홍보 영상 속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피크닉을 즐기는 장면은 허상인 셈이다. 심지어 기압 차이 때문에 창문을 만들 수도, 열 수도 없다. 이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상층부에서 물건을 떨어뜨린다면 중력가속도로 인해 대형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자금 조달도 난항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천문학적인 자금 조달 방편도 현재로선 모호한 상태다. 이 때문에 “왕세자가 허황된 약속만 늘어놓는다”는 비관론도 커지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투자 금액 5,000억 달러(약 650조원)는 더 라인을 짓는 데 드는 비용으로, 네옴시티 전체를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은 총 1조 달러(약 1,3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막대한 공사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조차 불투명한 와중에 대형 건축물만 줄줄이 늘리고 있어 비판이 거세다. 실제로 현재 네옴시티 프로젝트는 자금 문제로 인해 공사 진행이 더딘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의 불안정성 때문에 외국인 직접투자(FDI)에 기댔으나,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 2030년까지 연간 FDI를 1,030억 달러(약 132조2,005억원)로 확대할 계획이었으나, 2021년 FDI는 약 190억 달러(24조3,865억원)에 그쳤다. 당초 계획보다 전체 건설 비용이 두 배 이상 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건설 공사에 열악한 '사막'이라는 환경 여건도 비용의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력 및 투자자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실제로 주요 선진국에서는 여전히 네옴시티에 투자하는 것에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다. 초기 투자를 단행했던 일부 관계자들도 환경과 의사소통 문제로 중도에 그만둔 사례가 많다. 그럼에도 사우디 측은 사업비 마련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이나 즉답은 피하고 있다.
위장 환경주의, ‘그린워싱’
건축가들과 환경전문가들은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전형적인 '그린워싱(기업이 실제로는 친환경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친환경 이미지를 내세우는 행위)'의 수단이라고 평가절하한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대담한 약속을 앞세워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2011년 ‘사우디 그린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켜 2060년까지 탄소 배출 순 제로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다. 네옴 프로젝트 역시 이니셔티브의 일환이다.
그러나 국제 기후 변화 협상 전문가인 조안나 디플레지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는 “사우디의 계획이 처음에는 기후 논의에서 중요한 진전으로 여겨졌지만 철저한 조사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며 “사우디는 COP26 총회에서 주요 친환경 공약을 발표한 지 몇 주 만에 석유 증산을 약속했다”고 꼬집었다. 미국 시더빌대학 지질학과 톰 라이스 교수는 “기본적으로 이런 대형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다”며 “네옴시티 건설 단계에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은 영국이 1년 동안 내뿜는 것의 4배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온실가스 배출이다. 사막에 지어지는 네옴시티는 에너지 집약적인 냉각 작업 없이는 거주할 수 없다. 40도를 오가는 사막의 뜨거운 온도는 인간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도 있다. 대규모의 토목 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나 사막 기후에서 트로제나의 스키장에 투입되는 인공 눈 역시 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각종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우디 당국은 “계획대로 진행 중”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네옴시티의 화려한 이면에 숨은 인권 탄압
네옴시티 사업은 사우디의 처참한 인권 실태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했다. 네옴시티의 건설 부지는 유목민 후와이타트 부족이 사우디 왕국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거주하던 땅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된 뒤 약 2만 명이 강제 이주 위기에 몰리게 됐다. 2020년 4월에는 강제 퇴거 명령에 항의하는 영상을 제작한 운동가 압둘 라힘이 사우디 보안군에게 총살당했고, 2022년 9월엔 부족민 2명이 50년형에 처해졌으며, 10월에는 3명이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빈 살만의 부패와 네옴시티 프로젝트에 대해 비판했던 사우디 출신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2018년 의문의 암살을 당한 사건 역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캐나다에 망명한 사우디의 전 장관 칼리드 자브리는 “빈 살만은 극악무도한 인권 기록에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디스토피아적인 허영심을 자극하는 신도시를 계획했다”며 “무관심한 서방 지도자들은 그가 잔혹행위를 벌인 뒤 지문을 숨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네옴시티 사업으로 인해) 그를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옴 프로젝트가 빈 살만 본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정치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네옴 프로젝트에는 석유 부국 그 이상을 꿈꾸는 빈 살만의 야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네옴시티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사우디 정부, 사우디 국부펀드 PIF, 각국의 수출입은행들이 중심이 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향한 세계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자국의 인권 유린이나 언론탄압과 같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눈속임이라는 평가는 향후 사우디 국부펀드의 국제적 평판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