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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더스(Rapidus)’는 일본 정부의 주도로 도요타자동차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주요 대기업이 공동 출자한 준공영 반도체 회사다. 히가시 테츠로 전 도쿄일렉트로닉스 회장, 고이케 아쓰요시 전 웨스턴디지털 일본 사장 등 반도체 공급망 베테랑들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1일 8개 기업이 각각 70억 엔(약 667억원)을 출자하며 출범한 라피더스에 일본 정부도 700억 엔(약 666억원)을 지원했다. 이어 지난 4월에는 홋카이도 치토세 반도체 공장 건설을 위해 2,600억 엔(약 2조4,800억원)을 추가로 지원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직접 추진하는 ‘반도체 지원 3.0’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라피더스는 2㎚(나노미터: 1㎚=10억 분의 1m) 첨단 반도체 양산에 대만 TSMC 및 삼성전자의 연간 지출 규모에 맞먹는 5조 엔(약 45조2,500억원)을 투자해 2027년까지 양산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대표적인 빅테크 기업 IBM 및 유럽의 저명한 반도체 R&D 기관 IMEC와도 협력하고 있다.
빠르게 쫓아가겠다는 '라피더스'
라피더스라는 사명은 '빠르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따왔다. 여기에는 한국 및 대만과의 기술 격차를 해소하려는 시급성과 결의도 함께 담겨 있다. 슈퍼컴퓨터,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스마트 시티 등 첨단 분야와 신속하고 방대한 데이터 처리가 필요한 모든 분야에 필수적인 첨단 반도체 기술 개발 및 양산이 목표다.
히가시 데쓰로 라피더스 회장은 최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라피더스는 지난해 3나노미터급 양산을 시작한 삼성전자와 TSMC에 비해 20년 정도 뒤처졌다”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2030년대 초반에는 삼성전자와 TSMC도 아직 생산하지 못하는 1나노미터급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것이다. 오는 2025년 2나노미터급 반도체 시제품을 생산한다는 일정표도 제시했다.
라피더스가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 창립 멤버들은 각 사가 주력하는 산업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도요타, 이미지 센서 기술의 글로벌 리더인 소니, 일본 최대 통신사 NTT, 세계 2위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공급업체인 키옥시아 등 일본의 올스타가 모였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반도체는 경제안보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일본 민관이 하나로 뭉쳐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언급했듯 라피더스는 2025년까지 2나노미터 로직 반도체의 생산을 시작해 2027년까지 대량 생산한다는 일정표를 내놨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반도체 미세화 기술이 40나노미터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라피더스가 2나노미터 반도체에 필요한 '파괴적 혁신'을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특히 TSMC와 삼성과 같은 업계 리더들은 이미 핀펫(FinFET)에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트랜지스터 배열로 전환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그런 만큼 라피더스가 이같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조차 난관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반도체 제조 공정 발전사
대부분의 반도체는 일반적으로 '평면 트랜지스터', 더 엄밀히 말하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field effect transistor, FET)로 알려진 단순한 2차원 구조체를 사용한다. 반도체 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트랜지스터는 점차 소형화됐다. 이렇다 보니 갈수록 작아지는 평면 트랜지스터로 반도체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핀펫 기술이 도입된 것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핀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의 줄임말인 핀펫은 '핀'과 같은 구조가 특징이다. 핀은 고층 빌딩 처럼 위쪽으로 뻗어 있어 게이트와 채널 사이의 접촉 면적을 평평한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으로 전환한다. 효율성과 성능을 크게 향상시켜 반도체 기술의 획기적인 도약을 이뤘다는 평이다.
하지만 3나노미터 영역에 들어서자 핀펫 기술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업계는 트랜지스터 기술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혁신을 모색해야 했다. 삼성이 혁신적인 GAA(Gate-All-Around) 기술을 도입한 시점도 이때다. 게이트 주변을 빙 둘러싼다'는 이름 그대로, 채널과 게이트 사이의 접촉 면적을 3면에서 4면으로 확대했다.
GAA 기술의 중요성은 초미세 반도체의 대표적인 난제였던 전류 누설 문제를 해결했다는 데 있다. 4면에서 채널 주변의 게이트를 감싸고 있어 트랜지스터 내의 전류 흐름을 탁월하게 제어할 수 있다. 라피더스가 원하는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기술이 필요하다.
니혼게이자이 "과연 승산이 있을까"
이처럼 반도체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때 핀펫 기술을 건너뛰고 바로 GAA 기술을 습득 및 활용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라면 세 봉지도 다 먹지 못해 남기는 형국에 네 번째 봉지를 뜯겠다는 꼴이다. TSMC의 구마모토 공장도 핀펫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파운드리 운영에는 상당한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대규모 초기 투자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한 기업은 TSMC와 삼성, 단 두 곳에 불과하다. 라피더스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총 5조 엔(약 45조9,18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한다. 이는 일본 정부가 약속한 보조금 3,300억 엔(약 3조306억원)의 약 15배를 상회하는 규모다.
또한 2나노미터 반도체를 제조하려면 1,000~2,000개의 서로 다른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설 운영자를 포함한 대규모 엔지니어팀이 필요하다. 현재 100명의 엔지니어를 보유하고 있는 라피더스는 매년 수천 명의 신규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TSMC에 견줘보면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이처럼 많은 난제를 뚫어내야 한다. 과연 라피더스의 계획은 실현 가능한 걸까. 이와 관련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등 세계의 강호가 상대인 개발 경쟁에서 과연 승산이 있을까", "만약 성취할 가능성이 있다면 사상 최대 수준의 이익을 낸 상장사가 속출하는 지금 왜 민간에서 자금이 몰리지 않나", "어째서 국가에 의지하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