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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대만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TSMC가 독일 드레스덴에 반도체 공장(팹)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팹의 건설 규모는 약 100억 유로(약 14조4,800억원)에 달한다. 복수의 외신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TSMC에 50억 유로(약 7조2,400억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갈등에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유럽연합(EU)이 막대한 보조금을 약속하면서 인텔 등의 주요 기업도 독일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상황이다.
독일, 글로벌 반도체 공장으로 올라선다
지난 4월 430억 유로(약 62조원)을 투입해 EU 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유럽 반도체법'이 합의된 것과 더불어 유럽 각국은 반도체 설비 공정을 유럽으로 재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특히 독일은 이민법을 개정해 외국인들이 최장 1년간 독일에서 구직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고, 반도체 장비 기업인 ASML, 반도체 연구소인 IMEC 등을 통해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이다.
지난 6월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은 약 43조원을 투자해 독일 마그데브르크에 반도체 팹을 건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독일의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 기업 울프스피드도 약 4조원을 투자해 자를란트에 전기차용 반도체 팹을 건설할 계획으로, 전기차에 활용되는 실리콘카비이드(SiC) 공장과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할 방침이다. 전 세계 3대 차량용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인피니언 역시 드레스덴에 약 7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팹을 착공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머지 2개의 경쟁 기업은 인근 지역인 네덜란드의 NXP, 유럽 다국적기업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로, 3개의 기업이 모여 있어 독일 반도체 공장은 집적에 따른 '시너지(Synergy,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장이 됐다는 설명도 나온다.
TSMC의 독일 공장에는 보쉬, 인피니언, NXP가 각각 10%의 지분으로 참여한다. 70%의 지분은 TSMC는 자회사 ESMC에 배정되며,TSMC는 최대 34억9,993만 유로(약 5조700억원)의 자금 지원을 결정했다. 독일 정부의 보조금 50억 유로(약 7조2,400억원) 등을 포함할 경우 총투자액은 100억 유로(약 14조4,800억원) 규모가 된다. 내년 하반기 착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관계자들은 첫 제품 생산은 2027년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럽 반도체법, 유럽의 반도체 굴기 이끈다
지난 2009년 독일 반도체 업체 키몬다가 파산한 이후 15년간 반도체 장비 및 기술 연구에만 매진해 왔던 유럽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들어 전기차 대두 등의 이유로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는 데다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공급망도 흔들리자, 적극적으로 반도체 시장 침투에 나섰다. 글로벌 공급망 경쟁 시장에서 끌려가지 않겠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다.
EU집행위원회는 지난 4월 “세계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현재의 두 배인 20%로 끌어 올리는 목표를 달성하겠다”며 '유럽 반도체법' 시행에 합의했다. 2022년 기준 시장 점유율이 9%에 불과한 만큼, 계획대로라면 2030년까지 현재의 4배에 달하는 물량을 생산해야 한다.
EU집행위는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만큼 외부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생산 역량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집행위는 현재 유럽연합이 직면해 있는 현실에 대해 “최근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인해 유럽은 외부의 제한된 공급업체, 특히 대만과 동남아시아에 반도체 제조를 미국에 설계를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법안은 유럽 내에 반도체 연구 활성화를 위해 2027년까지 공공기금을 설립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금전적인 지원안과 더불어,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프레임워크, 회원국들 간의 협조를 골자로 한다.
법안의 특징 중 하나는 해외 기업이 EU 권역 내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지을 경우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 법안이 공개되자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인텔 등은 지난해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공개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반도체 공장만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장비 생산 시설까지 지원 범위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유럽 홀로서기 뒷받침하는 ESG 정책
업계에선 반도체 기업이 잇따라 독일을 선택하는 이유로 신재생에너지 확보가 손쉬운 점을 꼽기도 한다. 최근 들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책이 강화되면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고객의 ‘넷제로(Net-zero)’ 요구가 반도체 업계의 화두가 된 상황이지만 아시아 지역에서는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한 설비 구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면 독일 연방 에너지·수리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47%에 달한다. 태양광과 풍력, 조력 등 재생에너지 종류도 다양해 팹을 돌릴 때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문제는 자국에서 신재생에너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TSMC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9.2%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사용하는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전기 사용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8월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촉진을 위한 '반도체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일명 칩스법)'을 제정해 527억 달러(약 69조5,00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미국, 유럽이 반도체 생산에 대한 각종 제한을 걸고 있는 가운데, ESG 정책 지원이 잘 갖춰져 있는 유럽이 보조금까지 지원하겠다고 나선 만큼, TSMC뿐만 아니라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유럽 공장을 고민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미 관련 시설 및 기관이 집적돼 있는 독일 인근 지역이 새로운 '반도체 단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