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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으로 인한 일자리 위협과 더불어 넷플릭스 같은 거대 OTT 업체의 인색한 수익 배분으로 인해 146일 동안 이어졌던 할리우드 장기 파업이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로이터 등 외신보도에 따르면 할리우드 작가 1만1,500여 명이 소속된 미국작가조합(WGA)은 영화·TV제작자연맹(AMPTP)과 3년간의 노동 협약에 대해 잠정 합의를 이뤘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과의 합의는 아직이다.
잠정 합의안 도출
24일(현지 시각) CNN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언론은 WGA와 넷플릭스, 디즈니+ 등 대형 제작사들을 대표하는 AMPTP 간의 치열한 협상이 타결됐다고 보도했다. 그간 신속한 합의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협상이 길어지며 사안의 복잡성을 드러냈다. WGA는 합의안에 정확하게 어떤 조항이 포함됐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모든 부문에서 작가들에게 의미 있는 이익 보호가 보장됐다”고 전했다.
다만 파업이 공식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잠정 합의안은 1만 명이 넘는 조합원의 비준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WGA 지도부는 "파업이 아직 공식으로는 끝나지 않았으며, 합의안이 공식 비준될 때까지 직장에 복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직 할리우드가 정상 작동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50억 달러짜리 파업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디즈니+의 <블레이드> 등 수많은 유명 TV 프로그램과 영화가 이번 파업으로 중단되면서 50억 달러(약 6조7,600억원)에 이르는 경제적 타격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50억 달러라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작가, 배우들과 쉽사리 합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이 전선에서 물러날 경우 향후 50억 달러 그 이상의 인건비를 지급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OTT들이 해외 창작자에게 눈을 돌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표적으로 <오징어 게임>의 모든 권리가 넷플릭스에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스트리밍 시대에 배우와 작가들이 직면한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 스트리밍 시대 이전에는 배우와 작가들이 불규칙한 작업 스케줄 속에서도 안정적인 수입과 프로그램 수익에 따른 로열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프렌즈>와 같은 인기 프로그램은 수익성 높은 로열티 시스템의 대표적인 예로, 주요 캐스트 6명은 각각 외부 판매 수익의 2%인 2,000만 달러(약 255억원)의 로열티를 매년 지급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기존의 시청률 기반 수익 배분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배우와 작가의 수입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이에 이들은 안정적이고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작가와 배우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심각한 수준이다. 단역뿐만 아니라 마고 로비, 킬리언 머피를 비롯한 유명 배우들도 영화 홍보까지 중단하며 파업을 열렬히 지지했다.
특히 AI의 도입은 우려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AI는 전 세계 더빙 시장을 활성화시키거나, 과거에 사랑받았던 캐릭터를 되살려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AI 기술을 활용해 외국어로 연기한 배우의 입 모양도 상영되는 국가의 언어로 바꿀 수 있으며, 실베스터 스탤론 등 노화한 배우의 얼굴을 AI로 수정해 <록키>와 같은 유명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들이 제기되자 배우들은 자기 결정권에 대한 위협을 점점 크게 느끼고 있다. 사실 배우들이 요구하는 것은 'AI 도입의 전면적 금지'가 아니다. AI를 활용하되, 이를 배우들이 알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요청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사들은 이를 꺼리고 있다. AI가 곧 제작비의 절감으로 이어져서다. ‘탐욕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국내 시사점
국내 방송가 역시 OTT 플랫폼들로 인한 산업 재편에서 자유롭지 않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 글로벌 OTT와 긴밀히 연결된 산업 특성상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 6월 국내 작가단체 네 곳이 서울 종로구 넷플릭스 한국지사 앞에서 미국 작가조합 파업을 지지하는 연대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이들은 한국 콘텐츠 제작 사정이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만 국내 콘텐츠 업계의 상황은 미국과 다르다. 최근 국내 콘텐츠 업계가 빠른 속도로 넷플릭스, 디즈니 같은 글로벌 자본에 종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갑’과 ‘을’의 구도가 고착화된 만큼 미국처럼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으로, 되레 미국에서 파업이 길어지면 한국 콘텐츠를 더 많이 팔 수 있어 한국 입장에서는 이익이라는 냉정한 의견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다각적인 문제를 고려할 때 할리우드 파업의 잠정적 합의는 작은 불씨를 진화한 것에 불과하다. AI의 잠식부터 수익 시스템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우려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대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이 변혁기에 한국 콘텐츠 업계가 글로벌 OTT의 단순 하청기지로 남지 않으려면 기민한 판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