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미국 정보기술(IT)의 산실인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성별과 인종 등 스타트업에 대한 벤처캐피탈(VC)의 투자를 다양화하기 위한 법이 마련됐다. 미국 내 최대 연기금인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CalPERS, 캘퍼스)의 영향력 아래 미 VC 생태계 전반으로 다양화 기조가 퍼져나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다양성 정책의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캘퍼스 효과를 노리며 국민연금 역량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아직도 기본 'ABC 단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창업자 정보 수집, '다양화'의 초석?
11일(현지 시각) 캘리포니아주의 개빈 뉴섬 주지사는 VC들이 투자한 스타트업의 창업자 정보를 보고하도록 하는 주 법안에 최종 서명했다. 성별, 인종 등 측면에서 보다 다양한 스타트업에 대한 VC 투자를 촉진하겠단 취지로 마련된 법안은 오는 2025년 3월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법안이 시행되면 캘리포니아주에서 활동하는 VC는 해마다 자신들이 투자한 스타트업의 창업자 인종, 성별, 장애 여부, 병역 등을 보고해야 한다. 보고 사항엔 대상자의 성적 지향, 캘리포니아 거주 여부 등이 포함되며, 각 분류별 투자 건수와 금액이 전체 투자 대비 비율이 얼마인지도 보고해야 한다.
스타트업 분석업체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라틴계 및 흑인이 창업한 스타트업은 지난해 전체 벤처자금에서 각각 2% 수준 투자를 받았다. 또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의하면 지난해 여성 창업자에 대한 VC 투자금은 전체의 2.1%에 불과했다.
그간 미국이 소수 인종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해 온 건 사실이지만, 이처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VC 정책이 본격 도입되는 건 미국으로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최근 유색인종 여성 창업자에게 우선투자하는 VC '피어리스펀드'가 보수단체로부터 인종차별을 이유로 고소당했던 사례를 고려하면, 이번 VC 정책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 평할 수 있다.
정책 '드라이브' 건 캘리포니아, "믿는 구석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이같은 급진적인 정책은 미국 VC 생태계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우리나라와 미국의 VC 생태계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 VC는 유한책임회사(LLC)인 VC가 주로 연기금에서 자금을 조달해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주식회사인 VC가 주로 모태펀드와 정책자금에서 자금을 조달해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게 보통이다. 또 우리나라는 투자조합에 참여하는 출자자(LP)로 모태펀드를 비롯한 정책자금(정책금융+연기금)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미국은 연기금이 가장 중요한 자금원으로 작용한다. LP에서 연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달할 정도다.
미국 내 연기금 중에서도 캘퍼스의 영향력이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캘리포니아주의 VC 정책이 미 전반의 VC 생태계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된다. 일례로 캘퍼스가 기업의 경영 성과와 주가, 지배구조 등을 평가해 '포커스 리스트'를 발표하면 리스트에 포함된 기업의 주가는 크게 변동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특히 캘퍼스의 관여활동을 받은 기업의 경우 장기적인 주가가 벤치마크를 넘어서는 수익률을 보이기도 했다. 시장에선 이를 '캘퍼스 효과'라고 부른다.
'캘퍼스 효과' 노리는 韓, 정작 '꼼수'에는 속수무책
캘퍼스 효과를 감안하면 캘리포니아주의 다양성 정책은 차후 큰 파장을 일으키며 VC 생태계를 재정비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각종 다양성 정책을 내세워도 제대로 된 변화를 이끌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소벤처기업부를 중심으로 여성 창업자 우대 가산점 등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정작 진정한 의미의 '여성 창업자'를 배출하는 데엔 사실상 실패했다. 여성 창업자 우대 가산점 혜택을 받기 위해 어머니, 아내, 누나, 여동생 등 가족을 회사 대표로 내세우는 '꼼수'를 쓰는 기업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각에선 "다양성 정책을 법률로 전면에 세운 미국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캘퍼스처럼 우리나라도 국민연금공단 등 기관이 비슷한 역량을 갖춰 시장을 선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이미 지난 2018년 7월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도입하고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는 등 캘퍼스와 유사한 방식을 도입한 바 있다. 이른바 '중점관리사안'으로, 기업 배당정책 수립, 임원보수 한도 적정성, 법령상 위반 우려로 기업가치 훼손 및 주주권익 침해 사안, 지속적으로 반대의결권을 행사했으나 개선이 없는 사안, 정기 ESG 평가 결과가 하락한 사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캘퍼스가 초기에 했던 것처럼 따로 기업 리스트를 공개하지는 않지만, 그 수행 과정은 캘퍼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국민연금은 캘퍼스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국내 VC 생태계 구조 자체가 미국과 판이하다는 점도 문제지만, 국민연금이 내건 가이드라인이 다소 낡았다는 점도 문제다. 이에 국민연금은 내년 본격 적용을 목표로 새롭게 지정된 중점관리사안의 가이드라인을 마련 중에 있다고 밝혔으나, 시기가 너무 늦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또 국민연금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가 지나치게 형식적이라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중요한 건 제도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여활동을 수행해 나가느냐에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 캘퍼스 효과 또한 적극적인 활동을 기반으로 발생한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국내 VC 생태계가 재정립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