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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내 영향력 확대돼 정부 지원사격 발판 삼아 관련 산업 급성장 반도체 업계 '핵심 축'으로 부상한 아시아

미·중 통상 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베트남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핵심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고율 관세를 매기며 반도체 공급망 전반이 재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 외에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 등 다수의 아시아 국가가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탈중국' 수요를 흡수하며 업계 내 입지를 속속 확대하는 추세다.
베트남의 '반도체 질주'
8일 글로벌 비영리 기술 매체 '레스트 오브 월드(Rest of World)'가 최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인해 베트남 반도체 부품 업체들의 수주량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에 고율 관세를 매기고 중국의 우회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환적 관세까지 강화하자, 새로운 공급처를 찾는 글로벌 기업들의 수요가 동남아시아 등지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3년 베트남 출신 엔지니어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창립한 회로 기판 전문 업체 팹9(Fab-9)의 버트 아루칸 사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중국에 145% 관세 인상을 위협한 후 일주일 만에 주문량이 20% 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베트남 현지 반도체 기업들은 글로벌 수요가 동남아에 집중된 현 상황이 기회라고 판단,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베트남 최대 정보기술(IT) 기업인 FPT는 하노이 근처에 반도체 후공정 중 하나인 테스트 공정을 위한 공장을 건설 중이며, 국영 통신 기업인 비엣텔은 베트남 최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건설해 가동을 앞두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룡'들도 베트남에 주목하는 추세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 기업인 미국 엔비디아는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해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베트남에서 AI 연구개발(R&D) 센터를 개소하기로 합의했으며, 모바일 반도체의 최강자인 퀄컴도 지난 6월 베트남 하노이에 AI R&D센터를 신설했다. 인텔은 2010년 호찌민에 반도체 패키지 및 테스트 기지를 건설·가동한 이후 962억 달러(약 133조5,833억)에 달하는 누적 수출액을 기록했다. 이는 호찌민 산업단지인 하이테크 파크 수출액의 약 60%, 해당 기간 호찌민시에서 발생한 총수출액의 25%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삼성전자도 연내 베트남 사업장 내에 패키징 라인을 구축할 예정이다.
베트남 정부, 사업 육성 의지 강해
이처럼 베트남 반도체 업계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 지난 5월 베트남 주요 산업 도시 중 하나인 박닌성(Bac Ninh)이 발표한 ‘2045년 목표, 2025~2030년 반도체 산업 개발계획’을 살펴보면 베트남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박난성은 해당 계획을 통해 반도체 분야 대기업을 중심으로 FDI(외국인직접투자) 유치에 힘쓰고, IT 집중화 구역을 조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반도체 스타트업에 대한 저리 대출 지원 △국내 기업을 위한 반도체 혁신 지원 기금 조성 △반도체 제조업체를 위한 산업단지 토지 임대료 지원 등 추가 지원안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지자체를 넘어 중앙 정부 차원에서도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세다. 찐 총리는 최근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반도체 산업 발전 국가운영위원회 회의에서 늦어도 2027년 핵심 반도체 칩의 독자적인 설계·제조·테스트 공급망 구축을 목표로 범정부적 관련 산업 개발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공개하고, 각 정부 부처에 할당된 과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지시했다.
해당 회의는 '2030년까지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 발전 전략 및 인적 자원 개발 프로그램'의 이행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열린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은 10개 부처에 할당된 38개 사업 및 과제를 담고 있다. 현재 10개 사업은 예정대로 완료된 상태이며, 24개 사업은 진행 중이다. 나머지 4개 사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현재 진행 중인 주요 사업으로는 △특수 칩 개발 △전자 산업 △인재 유치 △반도체 분야 FDI 유치 등이 꼽힌다. 베트남 산업당국에 따르면 현재까지 베트남이 유치한 반도체 및 첨단기술 분야 FDI는 116억 달러(약 16조787억원) 규모다. 또한 현재 외국 기업 약 50곳, 베트남 기업 10여 곳이 칩 설계에 참여 중이며, 패키징 및 테스트 분야에는 외국 기업 14곳과 국내 기업 1곳, 지원 산업 분야에는 외국 기업 15곳이 몸담고 있다.

아시아로 몰리는 반도체 투자 수요
주목할 만한 부분은 베트남 외에도 다수의 아시아 국가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속속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아세안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 반도체 후공정 시장에서 13%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 6위 반도체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도체가 말레이시아 수출의 약 40%를 차지하는 주력 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룡들도 일찌감치 말레이시아를 반도체 핵심 공급망으로 점찍고 투자를 단행해 왔다. 인텔은 말레이시아 페낭에 미국 외 최초 3차원(D) 패키징 공장을 건설 중이며, 인피니언·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반도체 기업들도 앞다퉈 수십억 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도 GDP의 8%를 반도체 산업에 의존 중이다. 템피니스·파시리스·우드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된 웨이퍼 제조 및 장비 생산 단지에는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UMC·VIS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다수 진출해 있다. 싱가포르 정부가 28나노(1㎚=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제조 시설에 최대 15년의 법인세 감면을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내세운 결과다. 아울러 싱가포르는 반도체 제조뿐만 아니라 반도체 장비 생산 분야에서도 주요 투자지로 꼽힌다. 싱가포르가 현재 세계 반도체 장비 생산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 수준이다.
인도의 경우 단순 후공정을 넘어 '제2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반도체 산업 육성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14억 명의 인구가 창출하는 거대한 내수 수요와 풍부한 이공계 인재 풀을 무기 삼아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다. 특히 인도의 '반도체 미션(ISM)'은 100억 달러(약 13조원) 규모의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내걸고 글로벌 기업들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에 마이크론은 인도 구자라트주와 반도체 공장 건설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투자에 나섰으며, TSMC도 인도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며 현지 생산 공장 투자를 검토 중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관세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인도 노이다 스마트폰 공장을 확장해 대미 수출 물량을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SK하이닉스 역시 경영진이 현지에 방문해 투자 환경을 면밀히 검토하는 등 사업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