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토류 공급망 불안정에 흔들리는 美 제조업, 자립 구상에도 ‘먹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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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가격 상승→생산 차질 우려 확대
희토류 자립 외치는 미국, 회의론 확산
산업계 불만 고조에 생산기지 이전 논의도

미국의 관세 압박에 맞선 중국이 희토류를 전략적으로 무기화하면서 미국 산업계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전기차와 방산업 등 핵심 산업은 중국 의존도를 줄이지 못한 채 공급 불안을 호소하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비용 압박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의 이전까지 검토하는 상황이다. 미국 정부는 희토류 자립을 핵심 의제로 삼고 현실화를 추진 중이지만, 제련·가공 설비 및 기술 부족 탓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희토류 공급망 불안은 단순 산업계 불만을 넘어 정부가 설계한 산업 전략의 실현 가능성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국면으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중국 ‘전략적 압박’ 카드 소기 성과
16일(현지시각) 미국 에너지 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에 따르면 최근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전기차 광물 공급망의 지정학적 혼란과 철강, 알루미늄 등 수입 금속에 대한 관세 확대로 인한 비용 상승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업계의 위기 인식은 주로 희토류 공급망 불안정에 집중되는 양상이다. 철강 관세는 차량당 원가를 수백만 원 올리는 요인에 그치지만, 희토류 병목은 전기차 구동 모터, 전력전자, 센서 등 핵심 부품의 생산 자체를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의 우려는 현실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중국이 올해 초 전기차 모터에 필수적인 중(重)희토류 일부의 수출을 제한하면서 공급 불안이 실물로 전이된 것이다. 미 완성차업계를 대표하는 자동차혁신연합(AAI)은 “공장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는 내용의 비공개 서한을 트럼프 행정부에 전달했고, 디스프로슘 등 일부 품목은 불과 한 달 새 20% 이상 급등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수입선을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통관 지연과 허가제 강화 등에 가로막히며 신차 출시 일정까지 늦춰지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방산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사마륨과 게르마늄, 갈륨 등은 군수품 핵심 소재로 쓰이는데, 중국의 수출 통제 강화로 가격과 납기 모두 불안정해졌다. 한 드론 부품 제조업체는 중국 외 공급처를 찾는 과정에서 주문 납품을 두 달가량 연기해야 했고, 또 다른 업체는 사마륨을 평시보다 60배 비싼 가격에 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국방 소프트웨어 기업 고비니(Govini)의 조사에서는 미 국방부 무기체계에 쓰이는 부품 중 최소 8만 개 이상이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업계에선 이처럼 높은 중국 의존도가 단기간 내 해소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데 전망이 일치했다. 실제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중국의 희토류 정련 분야 점유율을 92%로 추정한 바 있다. 이는 미국이 전략 비축 확대와 공급처 다변화, 무희토류 대체 기술 개발 등을 동시에 추진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충격이 반복될 것이란 관측을 낳는다. 희토류를 무기로 한 중국의 전략적 압박이 지속되는 한, 미국 제조업은 생산 연속성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위협받는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산업계 전반의 시각이다.

단기 대응책 미비, 자립 목표도 현실화 요원
이에 미국은 희토류 자립을 공식 의제로 올렸다. 그러나 현장 평가와 실무적 제약은 냉정하다. 공급망 전문가인 코리 콤스 트리비움차이나 부국장은 “미국이 독립적으로 희토류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최소 1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콤스는 해당 발언에서 중국이 정제·합금 단계에서 보유한 설비와 공정 노하우, 동맹국 간 조정에 필요한 인허가·환경영향평가·주민 수용성 문제, 신규 정제 설비의 대규모 설비투자(CAPEX)와 숙련 인력 확보의 시간 소요 등을 구체적 근거로 제시했다. 즉 ‘10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전망이 아니라 인허가·설비투자·기술검증·시범생산 등 실무적 항목을 합한 보수적 산출치인 셈이다.
이 같은 격차는 양국의 역사적 선택과 산업 정책 차이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2002년 캘리포니아 마운틴패스(Mountain Pass)의 정제 시설을 사실상 폐쇄한 이후 정제·합금 역량 재건을 등한시했고, 정제·가공·자석 제조 역량을 대부분 해외에 의존했다. 반면 중국은 핵심광물 탐사에서 채굴·정제·합금·자석 제조·재활용에 이르는 밸류체인을 내재화하며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나아가 2만5,000여 건에 달하는 희토류 관련 특허를 축적하며 제도적 도구로서의 통제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결국 미국은 정부의 직접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미 국방부는 지난 7월 희토류 채굴·가공 기업 MP머티리얼즈 우선주 인수에 4억 달러(약 5,500억원)를 투입하고,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대출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동시에 고출력 자석의 핵심 소재인 네오디뮴·프라세오디뮴(NdPr)에 대해 kg당 최소 110달러의 가격을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올해 2분기 평균 시세였던 52달러의 두 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시장 가격이 바닥을 향해 떨어져도 투자 리스크를 줄여주는 ‘수요 앵커’를 정부가 직접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미 국방부가 민간 기업의 설비 확충을 단순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 지분을 보유하고 장기 가격까지 보장하는 것은 MP머티리얼즈의 사례가 처음이다. 이는 군수품 공급망을 민간 계약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안전판을 깔아놓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다만 공급 물량과 실제 스펙, 정제 효율에 관한 구체적 수치는 공개되지 않아 미국 내 대규모 자동차·방산 수요를 단기간에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다는 평가 또한 이어지는 실정이다.
정책과 산업계 전략 간 괴리 심화, 내부 불만 증폭
공급망 불안정으로 인한 생산 차질이 실제 가동 중단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내 제조업계의 불만도 쇄도하는 상황이다. 특히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일부 완성차 업체들은 미완성 전기모터를 중국으로 보내 자석만 부착한 뒤 역수입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라는 전언이다. 중국 내 생산 기지를 활용하는 것이 단기적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희토류 앞에서 되레 중국 의존을 강화하는 역설적 결과로 이어지는 모양새”라고 평가했다.
중국발 희토류 수출 통제가 불러온 불만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자동차부품협회(CLEPA)는 “4월 이후 회원사들이 제출한 수백 건의 희토류 수출 허가 신청 중 4분의 1만 승인됐다”면서 “중국 내 일부 지역 당국은 지식재산권 및 고객 명단까지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일본 스즈키 역시 부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소형차 ‘스위프트’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계가 관세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 현지 조달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글로벌 차원의 생산 중단 위험이 깔려 있는 셈이다.
이는 다시 미국 정부가 추진해 온 ‘리쇼어링’ 전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조업의 국내 회귀를 명분으로 고율 관세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정작 기업들은 라인 가동을 위해 중국 내 역조립이나 생산기지 이전을 논의하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작금의 희토류 공급망 불안은 개별 기업의 위기 대응 차원을 넘어, 미국이 설계한 산업정책 자체의 실현 가능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산업계의 불만이 단순한 원성을 넘어 냉철한 현실 진단으로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