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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벤처투자하기 더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벤처투자사(VC) 임원 A씨는 "멋모르고 기업가치만 빵빵 올려놓은 스타트업들이 요새 고민이 많겠죠"라며 기업가치(밸류에이션) 조정기라 투자자 우위 시장이 되어 오히려 더 낫다고 평가했다.
A씨에 따르면 투자 빙하기에 들어가며 몇몇 벤처사들은 투자 유치는 고사하고 생존에 대한 고민에 인원 감축 및 사무실 이전 등을 전방위적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근 수년간 이어진 벤처투자 호황기에 몸값만 잔뜩 높인 스타트업의 경우, 상황은 훨씬 더 나쁘다. 비싼 사무실에 입주한 상태고, 더 많은 인원을 채용했기에 고정비가 훨씬 더 많이 나가고 있다. 몇몇은 몸값을 낮춰 투자 유치에 나섰음에도 결국 헐값에 매각 혹은 폐업할 위기에 몰려있다. 왓챠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기업가치, 높게 인정받는 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냐
스타트업 창업자라면 누구나 밸류에이션을 높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지분 희석(Dilution)이 줄어들고, 투자금은 더 많이 들어온다면 외부의 시선이 바뀌기 때문이다. △예비유니콘 △아기유니콘 등 허울 좋은 간판도 달 수 있다.
문제는 높아진 몸값만큼 '마일스톤(단계별 경영성과)'의 난이도도 높아진다는 거다. 보통 투자사들은 2년의 기간 동안 투자금을 최대한 도전적으로 이용해 회사의 가치를 크게 키울 것을 요구하며, 투자 유치에 최적인 마일스톤을 제시한다. 다음 투자 유치를 위해 수행해야 할 마일스톤의 기준이 높아지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 창업자도 그만큼 무리할 수밖에 없다.
배달대행 플랫폼 '부릉'을 운영하던 메쉬코리아는 대규모 투자 유치로 예비유니콘(기업가치 1,000억원 이상 1조원 미만 비상장사) 자리에 오르면서 풀필먼트, 새벽배송 등으로 서비스를 확장했다. 녹색 오토바이가 점점 더 서울 시내를 장악하면서 혹자들은 배달의 민족이라는 서비스보다 부릉이라는 서비스에 더 각인이 됐다는 평을 내놓기도 할 만큼 고속 성장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대규모 설비투자가 수반되는 풀필먼트와 새벽배송에 발목이 잡히면서 실적이 악화한 나머지 사무실을 경상북도 안동으로 옮긴다는 소문도 돌았다. 현재는 M&A 시장에 매물로 나왔으며, 추가 투자 유치에도 실패했다.
플랫폼 기업들, 고평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시장
발란, 트렌비 등 명품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명품 플랫폼은 지난해 높은 기업가치를 바탕으로 받은 대규모 투자금을 마케팅에 쏟아부었다. 영화관과 TV에는 유명 배우를 앞세운 이들의 광고로 도배됐다. 마일스톤으로 제시한 높은 시장점유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높은 몸값은 후속 투자유치에 걸림돌이 됐다. 올해 초 시리즈C 투자 유치를 진행한 발란은 반년이 넘어서야 투자 유치를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목표로 했던 몸값은 8,000억원에서, 3,000억원대로 절반 넘게 깎였다.
메쉬코리아나 명품 플랫폼만이 아니다. 2020년, 2021년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예비유니콘 타이틀을 달며 주목받았던 스타트업 대부분은 기업가치가 뚝 떨어졌다. 이중 기존 투자자의 후속 투자로 버티고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투자 시장의 건전화를 기대한다
A씨에 따르면 투자사 곳곳에서 이번 기회에 과도한 밸류에이션을 억지 주장하는 벤처기업들이 사라지고, 건전한 투자 문화가 정착되기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확산 중이라고 한다. 그간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의 단어가 들어간 것만으로 기업 가치가 10배씩 부풀려지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나, 최근의 투자시장 불황으로 몇몇 스타트업이 무리한 몸값 부풀리기를 하다 실패했던 것이 시장 전체에 교훈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황소 이야기를 들은 엄마 개구리가 계속 배를 부풀기만 해서 외형을 억지로 키웠던 우화의 교훈이 벤처기업가들과의 대화에서 직접 먹혀들어 가는 상황이 되면서 투자 심사 대화가 훨씬 더 쉬워졌다는 A씨의 설명은, 다른 한편으로 그간 벤처 업계에 얼마나 무리한 몸값 부풀리기가 반복되어 왔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일 것이다. 기업가치 산정은 단순히 자금조달만을 위한 절차가 아니다. 투자자와 함께 미래 성장을 위한 로드맵을 그리는 과정이다. 투자 혹한기 눈앞에 보이는 숫자보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