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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벤처·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혹한기를 넘어 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세계 각국의 고금리 긴축정책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에 따른 경기 침체로 투자 심리와 고용시장이 크게 위축되었고, 추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일부 기업은 폐업하거나 구조조정에 나서는 실정이다.
미국 등 주요국 벤처투자 시장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며, 이에 따라 VC 등 업계 전문가들도 올해 2분기 전망 역시 부정적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투자유치 규모 급감
올해 1분기 국내 벤처·스타트업 투자유치 규모가 크게 줄었다. 지난 7일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스타트업 투자유치 금액은 8,95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 토막이 났다. 이는 2022년 1분기 3조9,038억원보다 77.05% 감소한 수치이며, 투자 건수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18% 줄어든 271건을 기록했다.
투자 규모별로 살펴보면 시장의 자금조달 상황이 얼마나 악화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올해 1분기 기준 300억원 이상 대형 투자는 총 4건으로 지난해 대비 84.6% 대폭 감소했다. 1,000억원 이상 초대형 투자 유치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1분기 1,000억원 이상 투자받은 스타트업은 크래프트테크놀로지, 그린랩스, 세미파이브, 리디 등 10건에 달했지만, 올해는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으로 알려진 디지털 디자인 전문기업 ‘디스트릭트’가 유일하다.
스타트업 고용 시장도 일단 채용은 증가했으나 꾸준히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달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2년 벤처·스타트업 고용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벤처·스타트업 고용 인원은 74만5,800명으로 전년 대비 8.1% 증가했지만, 정작 같은 기간 전체 기업의 고용 규모는 2.4%에 그쳤다. 특히 자본금 대비 10% 이상의 투자를 받지 못한 벤처·스타트업의 경우 고용 증가율이 더욱 저조했다.
미국 벤처 투자도 전년 대비 53% 급감
미국 등 글로벌 선진국의 벤처 기업들도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먼저 벤처 투자 정보기업 피치북(Pitchbook)과 내셔널 벤처캐피탈 어소시에이션(NVCA)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벤처 업계의 현황은 올해 1분기에 370억 달러(약 48조8,1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이는 지난해 1분기 820억 달러(약 108조1,800억원) 대비 55% 줄어든 규모로 2019년 이후 최저 수치다.
투자 건수와 엑시트로 불리는 투자금 회수율도 대폭 감소했다. 투자 건수는 3,000건이 채 되지 않으며, IPO나 M&A 등을 통한 투자금 회수은 714억 달러(94조2,200억원)에 그치면서 5년 만에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
전 세계 벤처투자 시장도 상황은 비슷하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CBInsights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 스타트업의 투자유치 규모는 760억 달러(약 100조원)로, 1년 전 1,620억 달러(약 213조5,840억원)보다 54% 줄었다. 세계 최대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YC)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2021년 4분기(1,779억 달러)와의 비교를 두고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
글로벌 시드단계(seed funding)와 초기단계(early-stage) 스타트업의 투자유치 규모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 크런치베이스(Crunchbase)의 글로벌 투자현황 자료에 따르면 1분기 글로벌 시드단계는 69억 달러(약 9조903억원), 초기단계 스타트업의 투자유치는 256억 달러(약 33조8,250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4%와 54% 감소한 결과로 시장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일반적으로 초기단계 스타트업은 후기단계보다 ‘상대적으로 경기변동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평가받아왔다.
침체 원인과 올해 전망은?
세계적으로 벤처투자 시장이 침체된 이유는 국내외 높아진 경제 불확실성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며 급격한 물가 상승을 부추겼고,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이 긴축정책으로 돌아서며 금융위기 이후 최대의 유동성 잔치가 막을 내렸다.
결국 글로벌 금리 인상 기조와 40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 공포가 만든 불확실성에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고금리 환경은 금융시장에도 불확실성을 불러왔는데, 특히 스타트업들은 IPO 일정을 연기 또는 철회하기 시작했으며, 투자자들은 회수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예금 상품 등 소극적인 투자처로 전략을 바꿨다.
문제는 전문가들의 향후 전망도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피치북이 내놓은 미국 벤처투자 시장 2분기 전망 보고서를 살펴보면, 지난해부터 감소한 스타트업 투자유치 규모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둔화하고 있지만, 정부가 목표로 하는 인플레이션 목표치보다 현재 수치가 현저히 높은 만큼 올해 미 연준이 고강도 긴축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피치북은 “시장엔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고 전망하며 “이러한 시장 회복의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현재 스타트업들은 현재 투자자들의 유동성 자금에 대한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미국 VC 업계에서도 2021년과 2022년 사이 미국 벤처 시장에 투입된 거액의 자금이 손실 또는 회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추가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