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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노버, 사우디에 20억 달러 규모 공장 건설 사우디, IT 산업 육성 및 기술 이전 기대 석유·청정에너지도 관심, 넓어지는 투자·협력 범위
중국 최대 PC제조사 레노버(중국명 롄샹, 聯想)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구축한다. 이와 함께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 중동·아프리카 지역본부를 설립하고 전용 연구개발(R&D) 팀을 구성해 현지 맞춤형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계획이다.
레노버, AI PC 중동 진출 박차
14일 중국 경제매체 제일재경에 따르면 레노버는 9일 사우디 국부펀드(PIF, Public Investment Fund)의 자회사인 알라트(Alat)로부터 20억 달러(약 2조9,000억원)를 투자받아 PC 및 서버 제조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투자는 지난해 5월 합의된 내용의 후속 조치다. 리야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알라트는 무함마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왕세자가 작년 2월 설립한 PIF 산하 투자기업으로, 2030년까지 1,000억 달러(약 146조7,000억원)의 자금을 투자해 △반도체 △스마트 기기 △스마트 빌딩 △스마트 가전 △스마트 헬스 △첨단 산업 △차세대 인프라 등 7개 사업부에 걸쳐 제조 허브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레노버는 20억 달러의 투자금을 부채상환 및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레노버는 사우디 리야드에 고객센터와 R&D 센터 및 중동·아프리카 지역본부를 세우기로 했다. 또한 사우디에 PC와 서버 제조기지를 새로 건설할 예정이다. 레노버는 이번 사업 확장을 통해 약 1,00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사우디의 일자리 창출과 기술 이전이라는 목표와도 부합한다.
이번 양국 협력의 배경에는 미·중 갈등 심화로 인한 중국 기업들의 자금조달 어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된 이후 중국 기업들은 새로운 투자처를 모색해 왔고, 그 대안으로 중동이 부상하고 있다. 사우디 입장에서도 이번 투자는 의미가 크다. 사우디는 '비전 2030' 계획을 통해 석유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다각화하려 하고 있는데, PIF를 통한 첨단산업 투자는 이 같은 전략의 핵심으로 꼽힌다. 더욱이 이번 투자는 단순한 생산기지 이전을 넘어 R&D센터 설립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우디의 기술 역량 강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중동과 아프리카 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적 거점 역할도 기대된다.
석유화학 분야서도 투자·협력 확대
중국과 중동 국가들의 투자 협력은 IT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난해 5월에는 사우디의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ARAMCO)가 중국 기업과 837억 위안(약 16조7,000억원)을 투자한 '화진 아람코 정밀화공 및 원료공정 프로젝트'가 랴오닝(遼寧)성 판진(盤錦)시에서 시공에 들어갔다. 아울러 중동 최대 석유화학기업 사빅(SABIC)이 투자한 연간 생산량 26만t(톤)의 폴리카보네이트 공장은 톈진(天津)시에서 상업 운영에 들어간 상태다.
사우디 석유화학 대기업의 대중 투자가 늘어나면서 아람코는 2023년 대중 투자를 가장 많이 한 해외기업 중 하나가 됐다. 아람코 관계자는 "우리는 중국 사업을 계속 확대하면서 대담하고 합리적인 장기 에너지 전략과 투자에 전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압둘라만 알 파기 사빅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수년간 그룹의 글로벌 매출에서 사빅 중화지역 사업의 기여율이 20%에 육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이 고품질 발전을 견지하고 있으며 거대 시장, 편리한 인프라, 우대 정책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빅은 대중 투자 기회를 계속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부연했다.
중국-중동 국가 협력은 기존 오일가스 무역에서 신에너지 분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중국 주식 중개기관 안융(安永)의 저우량(周亮) 중동사업부 책임자는 "안융 서비스의 중동 고객을 보면 중동 자본이 2급 시장(주식 유통 시장)에서 중국의 AI·자율주행·신에너지차 등 분야에 광범위한 주식 투자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스위스의 글로벌 투자은행 UBS가 지난달 발표한 업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중동 국가들은 경제 다원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에너지 전환 속도는 높이고 석유 산업 의존도는 낮추고 있다. 중국은 세계 1위 제조·수출 대국의 지위를 지키고 있으며 첨단 5G·신에너지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중동 국가 간 긴밀한 상호 협력으로 '윈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저우 책임자에 따르면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등 증동 국가는 일조량이 풍부해 신에너지 발전에 있어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들 국가는 인건비가 높기 때문에 인력을 대체하는 과학기술에 주목하고 있어 해당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국과 상호보완적인 협력을 펼칠 수 있다는 평가다.
외인들의 中 자금 회수와 대조적
이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중국을 외면하는 것과는 정반대 행보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경기둔화, 지정학적 긴장, 규제 강화, 시장 변동성 등을 이유로 중국에 대한 투자와 지출을 줄이고 있다. 중국에 집중하던 펀드들도 동남아시아, 일본, 호주, 유럽 등 다른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지난해 2분기 중국에서 자금을 회수한 금액만 150억 달러(약 22조원)에 이른다.
이와 관련해 마유란 엘라링엄 도이치방크 아시아·태평양 지역 투자은행 커버리지&자문 부문 대표는 “중국 자산의 밸류에이션은 아·태 지역에서 가장 매력적”이라며 “중동 투자자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시장이 정상화할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국부펀드는 주머니가 두둑하며 아시아에서 흥미로운 비즈니스를 찾고 싶어 한다”고 덧붙였다. 사무엘 김 도이치방크 한국대표 겸 아·태 지역 M&A 담당 회장도 “지정학적 긴장은 중국에 투자하려는 중동 펀드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중동 국부 펀드가 인수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황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