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HBM4 상용화 필수 기술 ‘HDB’
기술 정밀도 개선 등 긍정적 전망
장비업계 ‘돈이 벌리는 구조’까진 먼 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필수적인 ‘하이브리드 본딩’ 도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16단 이상 차세대 HBM 생산을 위한 설비 투자가 이어지면서 장비 공급망 재편 또한 앞당겨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장비업계에선 커지는 수요에 비해 수익성 구조는 여전히 열악하다는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전력 효율·속도·공간절약 모두 만족시키는 기술로 부상
8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차세대 HBM 제품 양산에 하이브리드 본딩(HDB) 기술 적용을 추진 중이다. 삼성전자는 이르면 내년도 시장에 공급될 HBM4(6세대 HBM) 제품에, SK하이닉스는 HBM4E(7세대 HBM)에 해당 기술을 적용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삼성전자는 D램을 쌓으면서 중간중간 얇은 비전도성 필름을 넣은 뒤 열로 압착하는 ‘TC-NCF’ 방식으로 HBM을 생산 중이다. TC-NCF 방식은 칩 사이의 공간을 완벽히 메울 수 있으며, 칩이 휘는 워피지(Warpage) 현상을 예방하는 데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열과 압력을 1,024개나에 달하는 각 범프에 일정하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탓에 불량률 또한 다소 높은 편이다.
SK하이닉스는 이 같은 문제점을 최소화하고자 ‘MR-MUF’ 공정을 택했다. 1차 작업에서 D램 칩을 쌓아 붙여 오븐과 같은 장비에 여러 개의 칩을 넣어 열을 가해 납땜을 하고, 이후 납땜 작업을 마친 HBM의 칩 사이사이에 끈적끈적한 액체를 흘려 넣는 식이다. 해당 공정은 열에 의한 칩 손상 걱정을 덜어낼 수 있다는 강점이 있지만, D램 간 간격을 좁게 만들어야 하는 적층 경쟁에서는 현실화가 쉽지 않다는 한계 또한 뚜렷하다.
HDB 방식은 이 같은 한계에서 출발했다. 해당 기술은 액체와 필름 형태의 접합제 없이 오로지 절연체와 구리 등 금속 소재만으로 칩과 칩을 붙이는 방식을 말한다. 이를 통해 칩 간격을 줄이면, 80마이크로미터(㎛) 이상의 여유 공간도 확보할 수 있다. 두께와 발열을 줄이고 속도 등 성능은 크게 향상할 수 있는 만큼 ‘꿈의 패키징 기술’로 불린다. 다만 접합제 없이 서로 다른 특성의 물질을 한 웨이퍼 안에 붙여야 하는 높은 기술 난도 탓에 상용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게 업계의 관측이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실질적인 설비 투자에 나서며 상황이 달라졌다. HBM4부터는 HDB가 기술 트렌드를 넘어 시장 진입 티켓이 될 수 있단 관측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HBM 기술 진화의 전환점에서 HDB는 그 위상을 완전히 달리하게 됐다”며 “심지어 최근에는 기존 본딩 방식이 극복할 수 없는 미세공정의 벽을 넘기 위해 반도체 구조 자체가 재설계되는 변화까지 감지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기술력 확보 전쟁 본격화
반도체 장비 생태계 또한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HDB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하면, 차세대 HBM 적층의 주류 공법으로 자리매김할 공산이 큰 만큼 반도체 장비 공급망 또한 크게 재편될 것이란 관측이다. 특히 HDB 공정에서는 미세 정렬, 정밀한 압착, 플라즈마 활성화 등 복합적인 기술력이 필요한 만큼 일부 장비 기업이 독식하던 공급망 구도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6월 ‘HBM 적층을 위한 D2W 하이브리드 구리(Cu) 본딩 기술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장비 반입에 속도를 냈다. 해당 논문에서 삼성전자는 “제한된 폼팩터(775μm) 안에 17개의 칩을 적층하기 위해서는 HCB를 통해 칩 간 간격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밝히며 세메스의 HCB 장비를 이용해 16단 HBM3 샘플을 만들었고, 정상 작동했다고 밝혔다. 이는 과거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일본의 TEL에 집중됐던 장비 의존도를 벗어난 행보로, 국내외 중소 장비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단 의도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 역시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간 SK하이닉스는 HBM 제조 공정에 전량 한미반도체 장비를 사용했지만, 최근 한화세미텍과 총 420억원 규모의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독점 구도가 깨졌다. HBM 시장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자체적으로 공정 최적화를 위한 ‘세컨드 벤더 발굴’에 박차를 가한다는 게 SK하이닉스의 구상이다.

경쟁 과열, 가격 주도권은 여전히 대기업에
HBM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삼성전자는 HDB 전환에 속도를 내며 분위기 반전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이를 위해 지난 2월에는 경기도 화성 사업장에 HDB 설비를 반입하고, 관련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송재혁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는 “경기 내내 이기고 있다가 9회 초에 역전을 당한 상황에서 현재 9회 말에 접어들었다”며 “재역전을 위해서는 노아웃 상황에서 첫 주자가 출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HDB 기술이 역전의 발판이 될 것이란 의미다.
이처럼 HDB 도입은 메모리 제조사의 기술 진화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한국 장비 업체들의 수익과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한 장비업체 관계자는 “중소 장비업체들은 삼성과 SK라는 대형 고객사를 상대로 기술을 공급하면서도 단가 인상이나 공급 조건 조정에 대한 협상력이 거의 없다”며 “월등한 기술력에도 이익은 거의 남기지 못하는 구조가 여전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특히 커스터마이징 요구가 많아질수록 투자 대비 회수가 안 되는 부작용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