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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시너지 노리는 SI들
PE “싸게 사서 다듬겠다” 전략
협상 여지 커진 희망가 6천억원

그동안 흥행이 불투명하던 애경산업 매각이 생활용품 판매 업체 애터미의 참여 검토 소식과 함께 본격 국면에 들어섰다. 유통망 확대를 노리는 전략적 투자자(SI)뿐 아니라 수익성 회복을 기대하는 사모펀드(PE)들까지 인수전에 가세하면서 경쟁 구도가 다자화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한때 고평가 논란이 있던 ‘6,000억 희망가’도 애경 측의 유연한 협상 가능성이 제기되며 현실 조정 국면에 접어드는 모습이다.
인수 검토 나선 원매자 속속
1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애경그룹은 최근 애경산업의 잠재 인수 후보들에 매각 개요가 담긴 티저레터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르면 내달 예비입찰을 진행하고,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한 후보 가운데 숏리스트를 추려 7월께 본입찰을 통해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매각 대상은 AK홀딩스와 애경자산관리 등이 보유한 애경산업 경영권 지분 63.38%다.
시장에서 애경산업은 비교적 ‘감당할 만한’ 매물로 통한다. 매각 측이 희망하는 애경산업의 몸값은 6,000억원 수준으로 현재 시가총액 약 3,700억원과 비교하면 다소 높은 편이지만, 지난해 말부터 시장에 쏟아진 조 단위 매물들보단 훨씬 합리적인 수준이라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주된 평가다.
그중에서도 중소형 하우스와 전략적 투자자(SI)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다. 복수의 중형 사모펀드(PE) 운용사가 매각 주관사 삼정KPMG에 티저레터 배포 시기를 문의하는 등 일찌감치 선제 대응에 나섰다는 전언이다. 현재 인수 후보군으로는 유통 및 소비재 분야에 경험이 있는 칼라일그룹,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 베인캐피탈, CVC캐피탈 등이 거론된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애경산업 매각 소식이 생각보다 빠르게 알려지면서 티저레터 배포 전부터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며 준비하는 PEF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시장에서는 생활용품 판매 업체 애터미가 인수전에 참전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애터미는 2023년 생산액 기준 국내 4위 화장품 업체지만, 대부분을 한국콜마 등으로부터 납품받아 판매한다. 애터미가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직접 생산하고 판매까지 하는 애경산업을 인수하면, 기존 생산시설을 활용해 제품 제조를 수직계열화하는 게 가능해진다. 다만 이와 관련해 애터미 측은 “신사업 인수는 정해진 바 없다”고 말을 아꼈다.
업계에서는 애경산업의 올해 1분기 실적이 고꾸라진 만큼 협상 과정에서 최종 매각가가 할인 조정될 가능성이 클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애경산업의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511억원과 6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0.7%, 63.3% 줄어들었다. 특히 화장품 부문 영업이익은 1년 사이 88.4% 감소했다.

시장 분위기 급변, ‘구조 개편 후 엑시트’ 시나리오
지난달까지만 해도 주요 PE들은 애경산업에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PE 특성상 5년 안팎의 구간에서 기업가치를 끌어올려 엑시트(투자금 회수)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데, 애경산업은 구조적으로 큰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이와 관련해 한 PE 관계자는 “애경산업의 잠재적 성장 동력은 뷰티사업 부문에서 찾아야 하지만, 이미 레드오션인 시장에서 뚜렷한 차별화 전략이 부재한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본격 매각 절차가 시작된 이후 다수의 중소형 PE가 실사를 타진하거나 초기 검토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나오면서 ‘진짜 경쟁’ 국면이 형성되고 있다. 인수 주체 구도가 기업 간 인수합병(M&A)에서 재무적 투자자(FI) 등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PE들이 애경산업에 관심을 보이는 배경에는 명확한 구조조정 시나리오와 낮아진 몸값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하고 있다.
실적 둔화에 직면한 애경산업이지만, 탄탄한 브랜드와 유통 효율성 개선 및 비용 구조 슬림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일부 PE가 SI와의 연합을 모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경이라는 브랜드 자산은 FI 단독 운용보다는 시너지 창출에 능한 기업과의 협업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구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FI보다 SI를 모집하는 방향이 더 설득력 있다”면서 “PE로선 성장성이 뚜렷한 비상장 뷰티기업을 SI로 검토하는 편이 향후 엑시트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몸값 재조정에 달린 인수전 향방
애경산업 매각이 이목을 끌게 된 핵심 요인으로는 가격이 꼽힌다. 처음에는 6,000억원이라는 매각 희망가가 지나치게 높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시장에서도 “애경이 내부 사정은 급한데, 가격은 안 급한 척한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시장 참여자들이 인수를 검토하기는커녕, 관심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배경이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가장 큰 변화는 애경그룹의 자세다. 그룹 내부적으로 이번 매각을 마무리 짓는 것이 중요 과제로 부상하면서 가격 조정 가능성에 대한 시그널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애경그룹은 단독 매각이든 분할 매각이든 다양한 방식을 열어두고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매각 주체가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만큼 실제 거래는 매각 희망가보다 다소 낮은 수준에서 체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다수의 PE가 인수 의지를 보이는 것도 애경이 몸값을 낮출 수 있다는 전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브랜드파워는 있지만 수익성에 의문이 있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것은 리스크 대비 진입 단가일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결국 현재 인수전에 불이 붙은 결정적인 배경은 ‘가격 현실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