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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분전에 日 배터리 업계 먹구름
배터리 공급망 전략 수정 불가피
수입 의존도 확대, 일본 내 대안 전무

닛산과 도요타 등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자국 내 배터리 생산을 사실상 포기하고 외부로 눈을 돌리면서 일본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 상실이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남아 있는 완성차 업체들도 자국 내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해 고립되고 있으며, 설령 일본 기업이 추후 생산설비를 늘린다 하더라도 자국이 아닌 미국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이에 일본이 배터리 산업의 주도권을 잃고 수입에 의존하는 수요처로 전락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세계 10대 배터리 업체 중 日 기업 파나소닉 유일
13일 일본의 경제신문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닛산자동차는 일본에 첫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설립하겠다던 계획을 취소하기로 최근 가닥을 잡았다. 규슈 섬 기타큐슈시에 건립 예정이던 해당 공장은 인산철 리튬(LFP) 배터리를 주력 생산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이르면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닛산은 공장 설립 계획 무산을 알리며 그 이유로 자동차 제조업체의 부진한 수익과 투자 금액 재검토 필요성 등을 언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닛산의 비즈니스 전략뿐만 아니라 일본의 국내 배터리 공급망 개발 야망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METI)은 오는 2030년까지 자국 배터리 생산 능력을 연간 150기가와트시(GWh)로 늘리는 목표를 설정했으며, 부품 및 자재 생산을 포함한 약 30개 프로젝트에 보조금을 승인했다. 그러나 최대 557억 엔(약 5,365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한 닛산 기타큐슈 공장이 무산되며 목표 달성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현재 일본에서 배터리 생산시설 구축과 관련해 진행 중인 대형 프로젝트는 파나소닉에너지가 스바루와 함께 총 4,630억 엔(약 4조4,500억원)을 투자하는 공장 건설이 유일하다.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 해당 공장은 이미 공정이 상당 부분 진행돼 무산될 가능성은 낮지만,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닛산이 빠져나간 공백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일본의 배터리 패권은 빠르게 위축 중이다. SNE리서치에 의하면 지난해 세계 10대 자동차 배터리 제조업체 중 6개가 중국 기업이었으며, 그중 CATL은 37.9%의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로 8년 연속 1위를 지켰다. 파나소닉은 이 명단에 포함된 유일한 일본 기업으로 6위에 그쳤다.
도요타도 발 빼며 일본 배터리 산업 실질적 ‘항복 선언’
자국 내 생산 시설 확대에 회의적인 기업은 비단 닛산뿐만이 아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일본 최대 자동차 그룹 도요타가 후쿠오카현에 건설 예정이었던 차세대 배터리 공장 건설을 전면 보류했다. 건설이 중단된 공장은 도요타자동차의 배터리 생산 자회사 도요타배터리가 공장 건설과 운영을 맡아 2028년부터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EV 시장 성장세가 예상보다 부진한 데다,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세에 낮아진 영업이익까지 부담으로 작용하며 결국 계획 철수 수순을 밟게 됐다.
도요타가 자국 내 신규 배터리 공장 설립 계획을 보류하면서 일본 배터리 산업의 한계 또한 수면 위로 부각되고 있다. 도요타는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업계에선 이를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 모두에서 뒤처진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배터리는 전기차 시장에서 핵심 부품이자 전략 무기인데, 일본 최대 완성차 업체마저 자체 생산을 미루고 수입에 의존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는 지적이다.
도요타는 자국 생산 대신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이 운영하는 미국 랜싱 공장에서 15억 달러(약 2조1,300억원) 상당의 배터리를 구매하기로 했다. 이 같은 도요타의 결정은 자국 내 공급망을 직접 구축할 수 없을 만큼 일본의 배터리 산업 기반이 약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십 년간 세계 자동차 기술을 주도해 왔던 일본이 핵심 부품 확보에서조차 타국에 의존하게 됐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게 업계의 주된 시각이다.

산업 경쟁력 퇴보, 플레이어에서 단순 구매자 전락
이런 가운데 향후 도요타가 생산기지를 확대한다 해도 그 대상을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도요타는 현재 건설 중인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공장에 이어 신공장 추가 건설 등을 검토 중이다. 션 서그스 도요타자동차 노스캐롤라이나 사장은 “향후 EV 수요가 증가하면 공장 증설이나 신공장 건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다른 지역도 검토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도요타의 행보는 자국보다 미국 시장에 더 큰 미래 전략을 배치하고 있다는 뜻이자, 그만큼 일본 내 제조 기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는 2030년까지 북미에서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차 판매 비중을 현재의 50%에서 80%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게 도요타의 중장기 목표다. 다만 구체적인 추가 투자 시점은 2~3년 동안 시장 수요를 점검한 후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일본 정부는 전기차 및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도요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든 민간 기업들의 선택은 점점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고비용 구조, 불확실한 수요 전망, 기술력 격차 등 복합적 한계가 일본 내 설비 확장을 막고 있단 진단이다. 일본이 글로벌 배터리 경쟁에서 ‘메이드 인 재팬’ 전략을 포기하는 날이 머지않았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