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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된 적자 행진에 매각설 본격화
국내외 PE마저 외면하며 ‘계륵’ 전락
전기차 중심 그룹 성장 전략 의문부호

SK가 전기차 충전기 자회사로 운영 중인 SK시그넷이 심각한 적자와 구조적 한계에 부딪히며 팔지도, 살리기도 어려운 계륵 같은 자산으로 전락했다. 글로벌 전기차 충전기 시장이 급격히 둔화한 가운데 SK시그넷은 기술 호환성과 확장성 모두에서 경쟁력을 잃었고, 뚜렷한 원매자 또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곧 SK의 전기차 투자 전략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면서 그룹 전반의 투자 리스크 관리 체계를 점검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결손금 누적되며 완전자본잠식 상태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SK시그넷의 지난해 매출은 838억원으로 2023년보다 65% 증가했다. 다만 같은 기간 영업적자도 2,452억원으로 전년 대비 63% 늘었다. 불과 2년 전인 2022년 매출 1,623억원, 영업이익 35억원을 기록했던 점을 고려하면, 반등이 절실하다는 게 업계의 주된 평가다.
SK시그넷은 1998년 설립된 시그넷시스템에서 2016년 전기차(EV) 충전기 부문 사업을 인적 분할한 시그널EV를 전신으로 한다. 2021년에는 SK그룹의 지주사인 SK㈜가 시그넷 EV 지분 55.5%를 2,930억원에 인수하면서 SK의 식구가 됐다. 모그룹의 탄탄한 지원을 바탕으로 2021년 말 SK시그넷의 순현금은 2,243억원에 달했고 부채비율은 19%에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전기차 시장의 성장이 둔화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전 세계 전기차 충전기 공장 가동률은 2022년 88%에서 2023년 71%로 떨어진 데 이어 지난해 32%까지 하락했다. 50kW 이상 고속 충전기 분야에서 세계 1위 지배력을 갖고 있는 SK시그넷 입장에선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시장 악화 속 SK시그넷의 재무건전성은 빠르게 악화했다. 사업보고서에 의하면 SK시그넷의 지난해 반품충당부채는 312억원을 기록했다. 2023년에는 없던 부채가 한꺼번에 비용으로 반영된 결과다. AS를 위해 쌓아두는 판매보증 충당부채 또한 2023년 말 87억원에서 지난해 말 193억원으로 뛰었다. 그 결과 SK시그넷의 지난해 기준 누적 결손금은 3,750억원에 달했으며, 자본 총계 마이너스(-) 1,028억원으로 완전자본잠식을 피하지 못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SK시그넷의 매각 가능성을 점치는 분위기다. SK는 그간 EV 시장을 미래 신성장 동력으로 꼽고 이차전지 사업인 SK온을 비롯해 SK넥실리스(동박), SKIET(분리막) 등 EV 밸류체인 확장을 위해 투자를 단행해 왔지만,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가뜩이나 전기차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SK시그넷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며 “SK그룹 내에는 시그넷 말고도 일렉링크 등 충전기 관련 산업이 산재해 있어 리밸런싱(구조개편)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1,500억원 유증+희망퇴직에도 분위기 반전 요원
다만 이 같은 시장의 해석에도 SK는 매각설을 부인하며 SK시그넷 살리기에 한창이다. 지난달에는 1,500억원의 3자배정 유증에 참여하며 실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1,150억원을 원재료 매입, 전기차 충전기 사양 업그레이드, 품목 확대 등 운영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는 기존 제품 품질 개선을 위한 목적 또한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결단의 바탕에는 2023년 발생한 저품질 이슈가 자리하고 있다. 2023년 일렉트리파이아메리카(EA), 프란시스에너지 등 SK시그넷의 주요 고객사들은 300억원 상당의 전기차 충전기를 반품했다. 제품이 자사가 요구한 성능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SK시그넷은 지난해 말까지 고객사들이 요구하는 수준을 충족하도록 제품을 개선해 재공급한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단기간 내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게 업계 중론이다.
여러 악재가 겹치며 지난달에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단행하기도 했다. 4월 초 진행된 희망퇴직과 관련해 SK시그넷 관계자는 “사업 진행 과정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뤄지는 통상적인 인력 재배치”라고 설명했다. 회사는 기업의 매각과 희망퇴직은 무관하다는 입장이지만, 시장에서는 전기차 시장의 부진이 장기화한 만큼 현재 SK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 대상에 SK시그넷이 포함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SK 투자 방향성·리스크 관리 체계 ‘흔들’
SK시그넷의 몰락은 캐즘(Chasm)을 넘지 못한 기술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캐즘이란 기술 수용 곡선에서 초기 수요자층과 주류 시장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을 의미하는 단어로, 시그넷은 기술 도입에 성공했지만 주류 시장 내 안착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캐즘의 단적인 예로 평가받는다. 단가 경쟁에서 밀리고 기술력마저 의심받는 상황에서 시그넷의 충전기는 선택될 이유가 사라졌고, 실제 수익은 투자 규모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렀다.
문제는 SK시그넷의 매각이 공식 추진되더라도 시장의 외면을 받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SK그룹 내 여타 자회사 매각과 비교했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로, 국내외 사모펀드(PE)들조차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점점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통상 대기업이 구조조정에 나설 때 PE 시장에서는 우량 자산에 대한 선점 경쟁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SK시그넷은 사업 매력도 자체가 낮은 데다 인수 후 수익화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게 투자업계의 관측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SK시그넷을 두고 “정리 대상이라기보단, 처리 곤란 자산”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이는 결국 SK그룹의 중장기 성장 전략에도 의문부호를 던진다.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전환이 본격화할 것이란 예측은 틀리지 않았지만, 충전기 등 후방 산업이 활성화할 시점과 기술표준에선 관측이 어긋난 것이다. 게다가 SK는 시그넷 인수 이후 4년 남짓한 짧은 기간 대규모 투자와 생산설비 확장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더 큰 손실 폭을 떠안았다. 예상보다 훨씬 좁은 시장과 치열한 경쟁 구조, 수익화되지 않는 기술 등 여러 요인이 SK를 깊은 함정으로 밀어 넣었다는 게 업계의 주된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