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줄인 서울대 채용박람회, ‘스펙의 시대’ 막 내리고 신입 대신 “경력자·AI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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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재학생도 취업 불안 심화
노동력 수요·공급 모두 고려해야
인건비·생산성 이유로 AI 대체 흐름
국내 대학 채용박람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울대 채용박람회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이다. 다수의 대기업이 참가 계열사를 크게 줄였으며, 재학생들의 기대치도 그에 따라 낮아졌다. 기업의 경력자 위주 채용과 인공지능(AI) 대체가 겹치면서 초급 직무 수요 위축이 뚜렷한 가운데, 스펙이 취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현실 또한 점점 더 선명해지는 양상이다.
구직자 1명당 일자리 0.4개 불과
25일 서울대 경력개발센터에 따르면 오는 9월 2~3일 이틀간 열리는 ‘2025년 하반기 서울대 채용박람회’ 참가가 예정된 기업은 총 127개로 지난해 134개에서 7개 줄었다. 해마다 얼굴을 내민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 올해도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CJ그룹이 뒤늦게 합류했지만 이들 기업 모두 참가 계열사 수를 대폭 축소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채용박람회에 소극적으로 나서면 올해 채용 부스 4개 중 1개는 정부 부처 및 관련 기관이 차지할 전망이다.
서울대는 2004년부터 매년 9월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취업을 돕고자 채용박람회를 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온라인 행사만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면, 20년 가까이 국내 대학 채용박람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해 왔다. 그러나 올해 들어선 참가 기업 수가 감소세를 보이면서 이 같은 위상이 꺾였단 평가가 지배적이다. 졸업을 앞둔 한 재학생은 “매년 오던 기업 중 상당수가 올해는 불참한다고 들었다”며 “규모가 줄어들면서 채용박람회의 이름값도 약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에 취업시장에선 청년들이 장기간 축적해 온 어학 점수와 자격증, 대외활동 등 소위 ‘스펙’이 과거와 달리 채용 여부를 보장하지 않는단 위기의식이 고개를 드는 모습이다. 실제 정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고용서비스 플랫폼 ‘고용24’의 지난달 구인배수는 0.40으로 2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구인배수는 신규 구직 인원 대비 구인 인원의 비율로, 구직자 1명당 일자리가 0.4개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취업준비생 입장에서 열심히 준비하면 길이 열릴 것이란 기대 자체가 흔들리고, 사회적 좌절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배경이다.

“경력 개발 초기 기회 제공해야”
전문가들은 취업시장의 구조적 변화에 주목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7월 고용동향에서 ‘그냥 쉬었음’ 청년 인구는 무려 73만3,000여 명에 달해 단순 일자리 부족만으로는 그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부 전문가는 기업들이 신규 채용보다는 경력직과 수시채용을 선호하는 구조적 변화가 자리 잡으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이 애초에 기회를 잡기조차 힘든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놨다. 여기에 경기 둔화와 고용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포기하는 청년이 증가했단 분석이다.
이 같은 증가세는 이미 일자리를 가졌던 경험이 있는 청년층에서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우려를 키운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청년층이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는 스펙이 높을수록 일자리 선택의 기준이 높아지고, 일시적 쉬었음이 장기적 비경제활동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청년층에게 경력 개발의 초기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업의 경력직 위주 채용 관행을 완화할 수 있도록 신입을 일정 비율 이상 뽑도록 유도하고, 청년 인턴제와 같은 제도를 실질적인 경력 인정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대기업과 공공기관에 집중된 선호 현상을 완화하고 중소기업과 신산업 분야에서도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청년들에게 ‘취업은 운’이 아니라 ‘준비하면 가능하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경력 축적 중심 커리어 전환 필요성↑
다만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초급 기술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점은 변수로 꼽힌다. HULT 인터내셔널 비즈니스스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업 리더 37%는 신입사원 대신 로봇이나 AI를 채용하고 싶다고 답했다. 또 인사 담당자 91%는 신입사원을 교육하고 적응시키는 것보다 경력직을 채용하는 편이 비용 면에서 더 효율적이라고 밝혔다. 청년층이 주를 이루는 신입사원도 비슷한 좌절감을 느끼면서 현재 직무에 필요한 기술을 갖췄다고 응답한 비율은 24%에 그쳤다.
이 같은 흐름은 실제 채용 현황에서도 수치로 드러난다. IT 채용 플랫폼 다이스(Dice)의 7월 보고서에 의하면 2024년 상반기에서 2025년 상반기 사이 경력 6~9년 차 채용 공고는 20%, 10년 이상 경력직 채용 공고는 17%가 증가했다. 반면 신입 또는 3년 이하 경력자를 대상으로 한 채용 공고는 3% 감소하며 유일하게 뒷걸음쳤다. 이를 두고 타냐 무어 웨스트먼로 최고인사책임자는 “지금의 상황은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 비견할 만하다”면서 “AI가 결국 거의 모든 산업과 일자리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에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겐 AI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비즈니스 감각을 보여줄 수 있는 경력을 쌓는 등의 차별화가 요구되는 모양새다. 글로벌 구직 사이트 인디드(Indeed)의 한나 칼훈 AI 부사장은 “기본적인 AI 도구 활용 능력, 즉 프롬프트 작성과 반복 실험, 평가 역량을 갖춘 인재가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며 “나아가 AI가 워크플로우에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 전략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면, 어느 때보다 막강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