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스타트업 인수전서 등 돌린 애플, 하드웨어 중심 ‘느린 진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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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랄AI·퍼플렉시티 인수 무산
하드웨어 및 인프라에 투자 집중
방향성 혼란에 내부 불만 고조

애플이 추진하던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인수 논의가 잇따라 무산되면서 전략적 혼선이 부각되는 모습이다. 애플은 이달 초 6,000억 달러(약 800조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발표하며 하드웨어와 인프라 중심의 행보를 강화했지만, 직원과 투자자들이 체감할 만한 성과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업계에선 애플의 AI 전략이 급격한 전환보다는 점진적 보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단 진단이 나오는 가운데, 특유의 ‘느린 진화’ 행보를 이어갈 것이란 관측에도 무게가 실린다.
리스크 최소화에 방점
26일(현지시간) IT 전문 매체 디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애플은 에디 큐 서비스부문 수석부사장의 주도로 추진되던 미스트랄AI와 퍼플렉시티 인수안을 최종 부결했다. 인수 가격 대비 높은 통합 난도, 데이터 거버넌스와 프라이버시 기준 충돌, 애플식 제품 로드맵과의 정렬 문제 등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전언이다. 이 같은 결정은 ‘자체 개발 우선’과 ‘리스크 최소화’라는 애플의 오랜 규율을 재확인한 사례로 평가된다.
그간 애플은 머신러닝 기반 기능을 과장 없이 ‘자동화 시스템’으로 설명하는 등 AI 전환에 있어 매우 신중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유지해 왔다. 개인정보 보호 중심 설계와 온디바이스 처리, 자체 설계 칩과 운영체제를 축으로 한 수직 통합 구조가 자사의 강점인 만큼 외부 기술을 대규모로 이식하는 것은 조심스럽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대형 AI 스타트업을 인수할 경우, 기존 표준과의 충돌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게 애플 경영진의 시각이다.
다만 투자에 대해서는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31일 열린 분기 실적 발표에서 주당순이익(EPS) 1.57달러, 매출 940억4,000만 달러(약 131조원)에 달하는 역대급 실적을 공개하며 “AI 투자 확대와 로드맵 가속을 위한 인수합병(M&A)에 열려 있다”고 밝혔다. 하드웨어와 제조 공정, 반도체 및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투자해 시스템 수준에서 AI 성능을 끌어올린다는 게 애플의 구상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이번 인수 무산이 장기 일관성에 무게를 둔 전략적 행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애플이 고평가된 외부 자산을 사들이기보다 내부적으로 프라이버시와 온디바이스라는 차별점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단 분석이다. 다만 일각에선 비판적 평가도 나온다. 애플 전 이사였던 맷 머피 멘로벤처스 파트너는 “애플이 그 정도 자산을 가지고도 AI 분야에서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6월 말 기준 애플이 보유한 자산은 1,330억 달러(약 185조8,000억원)에 달한다.
AI 핵심 인프라 구축에 대규모 투자
이와 같은 비판적 평가에도 애플은 다소 느린 AI 전략을 놓지 않는 모양새다. 쿡 CEO는 이달 초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본사에서 열린 임직원 대상 연설에서 “애플은 늘 최초가 아니라 ‘최적화’를 통해 시장을 바꿔왔다”며, “AI에서도 같은 비전을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자체 AI 칩 발트라(Baltra)를 비롯한 다수의 제품 라인업이 공개를 앞두고 있다며 “일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말 많은 것이 준비돼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애플은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 중심으로 AI 투자를 강화하는 행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 5일 공개된 ‘미국 제조 프로그램(AMP)’이 대표적 예다. 애플은 향후 4년간 미국에 총 6,000억 달러를 투입한다고 밝히며 반도체 설계와 제조, 패키징, 서버 생산 등 전 공정을 포함하는 포괄적 계획을 내놨다. 협력사에는 코닝, TSMC, 브로드컴 등 핵심 소재·장비 업체 10곳 이상이 포함됐다. 이처럼 광범위한 협력안은 단순한 조립에서 벗어나 AI 핵심 인프라를 미국에서 자체적으로 구축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서버 부문의 투자도 꾸준히 확대 추세다. 애플은 텍사스 휴스턴에 25만ft²(약2만3,200㎡) 규모의 서버 공장을 신설 중이며, 이를 통해 실리콘 기반 보안 아키텍처가 적용된 전용 서버를 양산할 예정이다. 해당 서버는 ‘프라이빗 클라우드 컴퓨트(Private Cloud Compute)’ 환경을 지원하며, 애플 인텔리전스 서비스의 핵심 인프라로 작동할 전망이다. 이 외에도 애플은 코닝과의 협업으로 아이폰·애플워치 커버 글라스를 켄터키에서 생산하고, MP머티리얼즈와는 희토류 자석 공급 계약을 맺었다. 또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과는 신공정 공동 개발을 진행 중이다.
업계는 애플의 AMP 구상을 공급망 재편 차원의 청사진으로 보고 있다. 애플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베트남·인도 등지로 생산 기지를 다변화했으나, 이번에는 반도체·서버·패키징을 중심으로 미국 내 회귀를 공식화했다. 이는 AI 경쟁에서 칩과 서버 운용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된 상황과 맞물린다. 애플이 이번 전략을 통해 기술 내재화와 공급망 안정화를 동시에 노렸다는 게 업계의 일관된 평가다.

현장-경영진 간 인식 차이 뚜렷
문제는 이처럼 느린 AI 전략이 내부적으로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시리를 비롯한 주요 모델의 성능이 수년째 정체된 데다, 경영진이 소극적 판단을 이어가면서 직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는 게 내부 전언이다. 성과 부진과 의사결정 지연이 맞물린 결과 주요 연구진을 중심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졌고, 이는 다시 경영진과의 인식 차이로 이어지면서 내부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핵심 연구 인력의 연이은 이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애플에서는 메타로 이직한 루밍 팡, 톰 건터, 마크 리, 보웬 장, 윤 주, 프랭크 추 등 애플파운데이션모델(AFM)팀 핵심 인력 6명을 비롯해 최근 1년 사이 최소 12명 이상이 회사를 떠났다. 남은 직원들 사이에는 “중추 인력이 빠져나갔다”는 절망감이 확산했고, 결국 애플은 지난해 하반기 출시한 신형 아이폰에 새로운 파운데이션 모델 기반 시리를 탑재하겠다는 계획을 전면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챗봇 투자 부재도 논란을 키우는 요인이다. 꾸준한 외부 파트너십 다변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혼선이 이어지면서다. 애플은 앞서 앤스로픽에 맞춤형 클로드 모델 훈련을 요청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됐고, 최근에는 구글 제미나이 모델을 시리에 접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동시에 자체 모델 ‘린우드’와 외부 모델 ‘글렌우드’를 병행하는 베이크오프(bake-off)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병행 전략은 방향성의 모호함만 부각시키며 내부 혼란만 극대화하는 실정이다.
애플 AI 전략의 문제는 투자 부재가 아닌 ‘방향성 혼란’에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드웨어와 인프라를 중심으로 막대한 투자가 전개되고 있음에도 직원과 투자자들이 체감할 만한 성과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다만 이러한 평가에도 애플은 급격한 전략 전환보다 내부 기준에 맞춘 점진적 보강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이에 애플의 AI 전략 또한 뚜렷한 성과보다는 느린 진화라는 특유의 행보를 이어갈 것이란 전망에도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