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에 빠진 석유화학 구조조정, 연내 신용등급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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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석화 기업 수익성 악화일로 개별 NCC 설비 효율화·자구안 마련 중요 하반기 내 등급조정 가능성 있어

구조적 침체에 빠진 석유화학 산업이 사업 재편 향방에 따라 신용등급 리스크가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위기에 처했다. 중국·중동발 공급 과잉에 시름하고 있는 석유화학 기업들이 정부가 제시한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량에 맞춰 내놓을 구조조정안에 따라 당장 하반기에 신용등급이 조정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나신평, 구조 개편따라 신용도 반영
18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나이스신용평가는 전날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나이스 크레디트 세미나 2025'를 열고 석유화학 기업들의 구조조정 이행 시기와 내용에 따라 하반기 신용등급 변동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지형삼 나이스신용평가 기업평가본부 책임연구원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적 저하가 지속되면서 채무 상환 능력이 떨어질 경우 하반기 신용등급 조정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 구조의 개선 여부나 설비의 효율화 정도, 핵심 자산의 매각 조치 등도 신용등급에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의 수익성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LG화학·롯데케미칼·SK지오센트릭·한화토탈에너지스 4개사의 합산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0.3%를 기록했다. 2023년만 하더라도 한국의 영업이익률은 2.5%를 기록해 에네오스·미쓰비시화학 등 일본 석화사 8곳의 영업이익률(1.8%)을 상회했으나 상황이 급변했다.
업황 침체로 손실이 누적된 석유화학 기업들의 신용도에 대한 우려는 실제 등급 조정으로 꾸준히 반영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나이스신용평가가 장기 신용등급이나 등급 전망을 내린 석유화학 기업이 7개사나 발생했다. 효성화학과 롯데케미칼 등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신용도 평가가 낮춰졌다. 지난 6월 나이스신용평가는 롯데케미칼의 장기 신용등급을 기존 ‘AA’에서 ‘AA-’로 하향 조정했고, 등급 전망을 ‘부정적’에서 ‘안정적’으로 부여했다. 당시 나이스신용평가는 “업황 침체가 지속되고 있어 수익성 개선이 제한적일 것”이라며 “악화한 영업현금창출력을 고려하면 채무 상환 능력 개선에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는 점 등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감산, 중동은 증설 러시
사실상 벼랑 끝에 내몰린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은 지난달 사업 재편을 위한 협약을 맺고, 정부가 제시한 '최대 370만 톤 규모의 NCC 감축'을 목표로 연말까지 구체적인 안을 내놓기로 한 상황이다. 단순 계산하면 NCC 설비 2~3개를 폐쇄하는 규모와 맞먹는다. 이에 따라 여수·대산·울산 등 국내 3대 석유화학산업단지에서는 정유사와의 수직 계열화와 인접 NCC 간 수평적 통합이 논의되고 있다. LG화학은 GS칼텍스에 NCC 통합 운영 방안을 제안했으며,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NCC 통합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의 NCC를 통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실질적 감산 효과에 대한 회의론이 팽배하다. 중동 산유국들은 원가 경쟁력과 신기술을 앞세워 공격적인 증설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걸프만석유화학연맹(GPCA)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걸프협력이사회(GCC) 국가의 석유화학 생산능력은 2012~2023년 연평균 4.7% 증가했다. 2021년 이후 성장세가 주춤했음에도 이들 지역은 2023년에만 총 1억5,620만 톤 규모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실제 사우디의 국영기업 아람코는 프랑스 토탈에너지와 합작해 사우디 동부 산업단지에 석유화학 설비를 짓는 ‘아미랄(Amiral)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업 규모만 6조원이 넘고, 부지는 200만 평에 달하는 초대형 단지 조성 사업으로, 완공 시 에틸렌을 연간 165만 톤을 생산할 전망이다. 아람코는 또 중국 시노펙과의 합작법인 야스리프(Yasref)를 통해 기존 단지를 확장하며 생산능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 민영 석유화학 기업 헝리석유화학, 롱셩석유화학 등에 각각 10%가량의 지분 투자를 진행하며 글로벌 입지를 넓히고 있다.
NCC 중심 나프타 의존도, 가격 변동성에 취약
가격 경쟁력으로 무장한 중국의 공세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는 점도 국내 석유화학업계에 큰 리스크다. 중국 석유화학업계는 2010년대 들어 경제 성장과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NCC 증설에 힘썼다. 이후 중국은 한국보다 월등한 생산능력과 저렴한 인건비에 따른 가격 경쟁력을 보유, 범용 제품 생산에서 우위를 점했다. 중국은 에틸렌을 2023년 5,174만 톤 생산했는데 이는 2020년 자국 생산량보다 60%가량 많은 양이자, 2023년 한국 에틸렌 생산능력(1,280만 톤)의 4배에 달하는 숫자다. 그러면서 공급과잉과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 여천NCC와 롯데케미칼 등 대기업을 포함한 국내 석화 기업들이 수년째 수출 시장에서 고전 중인 배경이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석유화학 제품 수출에서 대(對)중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47.8%에서 2023년 37.3%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따라 국내 NCC 가동률도 2021년 93.1%에서 2022년 81.7%, 2023년 74.0%로 떨어질 만큼 일감이 줄어든 상황이다. 이와 함께 글로벌 저유가 여파까지 악영향을 미치면서 지난달 석유화학 제품 수출단가는 전년 동기보다 12.6%나 하락했다. 심각한 수익성 악화도 여전하다.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 등 국내 4대 석유화학사 합산 영업손실(석유화학 부문 기준)만 지난해 상반기 700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4,762억원으로 1년 만에 7배가량 늘었다.
한국 석유화학의 위기는 단편적·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구조적 요인에 따른 것이어서 더 심각하다. 특히 NCC 중심의 높은 나프타 의존도는 원자재인 원유 가격 변동성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다. 정부가 NCC 감축을 핵심 과제로 요구한 것도 이런 배경 탓이다. 무엇보다 이 같은 구조적 악재는 이미 수차례 예고됐음에도 국내 업계가 호황에 취해 오히려 생산시설을 늘리고 고부가가치 품목 전환도 빨리 이루지 못해 위기를 자초했다. 한 업계 전문가는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구조적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대대적인 연구개발(R&D) 혁신이지만, 지난 20여 년간 관련 투자는 사실상 전무했고 전문 인력 기반도 취약하다”며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