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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통한 첨단산업 분야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8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추가로 조성한다. CVC는 비금융기업이 대주주인 벤처캐피털로, 정부는 기업 간 협력을 통해 신산업 창출은 물론, 새로운 시장 개척과 산업 혁신 생태계의 경쟁력을 높일 수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목적 투자대상은 국가첨단전략산업 분야 중소·중견기업
24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오는 10월 31일까지 ‘CVC 스케일업 펀드’ 운용사를 모집한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CVC를 통한 중소기업 육성 정책이 중소기업 지원 효과는 물론 첨단전략산업 분야 전반의 생태계 경쟁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 관련 펀드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부가 산하 기관인 산업기술진흥원을 통해 400억원을 출자하면 운용사가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자금을 유치해 운용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주목적 투자대상은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바이오 등 국가첨단전략산업 해당 중소·중견기업이다. CVC 펀드 특성에 맞게 운용사 선정 시 펀드 운용능력 외에도 모기업의 기술력, 사업화 역량, 네트워크, 해외시장 진출 역량 등을 피투자기업의 지원과 연계하는 전략과 체계를 중점 심사할 계획이다.
CVC 스케일업 펀드는 CVC를 설립한 모기업이 피투자기업인 중소기업의 신속한 시장진출과 성장을 지원하는 펀드로, 대중견-중소기업 간 협력을 통해 신산업 창출, 신시장 개척과 더불어 국내 산업혁신 생태계의 경쟁력도 제고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 CVC 모기업들은 중소기업에게 자사의 글로벌 판매망을 활용한 수출시장 개척, 신제품 공동개발, 납품·협력사로의 편입 등 성공사례를 창출하고 있다.
CVC 보유 허용 1년 만에 2,100억원 출자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가 허용된 지 1년 반 만에 8개의 CVC가 신규로 설립되면서 현재 12개 CVC가 운영되고 있다. 그동안 금융자본인 은행과 산업자본인 기업 간의 결합을 제한하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일반지주회사는 CVC를 보유할 수 없었으나, 2021년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조건부로 허용됐다. CVC의 잇단 진입은 침체된 벤처투자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에만 130개 중소기업에 총 2,100억원의 자금을 투입했는데, 글로벌 경기 둔화로 인해 투심이 꺾인 시기에 나온 결과물이다.
CVC는 단순히 재무적 동기만을 가지고 투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벤처산업의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전체 VC 투자의 3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CVC는 인수합병(M&A) 시장을 활성화하고, 대·중견기업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촉진해 벤처 생태계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장점으로 이미 해외에서는 구글이나 인텔을 비롯한 대기업 CVC들이 벤처 투자 생태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창업의 시작은 기술력과 아이디어지만, 종국엔 자금력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갈린다. 신기술을 통해 기존의 밸류체인을 변화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투자금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국내에는 스타트업의 규모를 키워줄 민간 VC의 자금력이 빈약한 탓에 스케일업이 어려웠다. 유망한 기업을 발굴하더라도 후속 자금 모집에 난항을 겪다가 해외 VC에 투자를 뺏기거나 결국 사장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에 정부에서 중소기업의 투자를 독려하기 위해 모태펀드를 조성, 민간 VC에 지원하고 있으나 문제는 투자 규모다. 정부는 형평성 문제 등을 이유로 경쟁력 있는 VC에 출자를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VC에 자금을 고루 분배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 1천억원 규모의 모태펀드를 조성했다고 해도, VC 20군데에 출자를 나누면 VC당 50억원밖에 돌아가지 않는다. 국내 VC들이 최소 30개에서 최대 100개 안팎의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비춰볼 때 연간 많아야 2억원, 적으면 4천만~5천만원 밖에는 신규 투자를 거두지 못하는 셈이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이 대부분 시리즈 A나 프리 A, 또는 프리 시드 라운드 위주로 돌아가는 이유다.
우리나라에 유니콘 기업이 적은 이유
정부는 창업을 강조하며 초기 투자에 집중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적인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주체는 스케일업이다. 스타트업은 스케일업을 거치면서 유니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6월 한국무역협회(KITA)의 ‘스케일업을 위한 스타트업 생태계 국제비교 및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주요국 가운데 GDP 대비 벤처투자 순위가 높고, 기술 기반 창업 비중이 증가하는 등 스타트업의 토대는 일정 수준 갖춰졌으나, 스케일업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국내에는 창업 초기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지 않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스케일업 기업 비율은 6.5%로 영국, 이스라엘 등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통상적으로 스타트업은 창업 이후 M&A나 IPO(기업공개) 등의 성과를 내기까지 두 번의 큰 위기를 겪게 된다. 바로 ‘죽음의 계곡’과 '다윈의 바다'다. 죽음의 계곡은 창업 초기 사업화 단계에서의 자금상 어려움을 뜻하는 말로, 일부 전문가들은 2단 엔진 점화에 실패한 로켓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벤처기업의 사업화 성공률은 50%도 채 안 된다. 또한 이 데스밸리를 건너 시장에 신제품을 출시한다고 해서 모두가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아니다. 다윈의 바다는 악어 떼와 해파리가 득실대는 호주 북부의 해변을 일컫는 말로, 신제품이 수익을 내거나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기존 제품들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국내 상당수 기업은 이 과정에서 대부분 쓰러진다. 국내 벤처기업의 5년 이상 생존 기업의 비율이나, 스케일업 비율이 저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렇다 보니 전 세계 유니콘 기업 중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2%로 미미한 수준이다. 글로벌 시장데이터기관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9년 1월∼2023년 1월 기준) 전 세계 유니콘 기업 수가 2.7배(449개→1,209개) 늘어나는 동안 한국의 유니콘 기업 수는 1.4배(10개→14개) 증가하는 데 그쳤으며 전 세계 비중은 1.0%p(2.2%→1.2%) 감소했다.
실리콘밸리로 입증된 민간 주도 투자의 힘
그간 우리나라 벤처 산업은 정부 지원에 의존하다 보니 정부가 발을 빼는 순간 무너지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창업은 양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니콘 기업이 많이 배출되지 못하는 것도 이런 구조적 문제 탓이다. 그만큼 대부분 스타트업이 규모를 키우지 못하고 머물러 있거나 소멸하는 비율이 높단 뜻이다.
벤처 펀드는 안정적인 벤처 생태계 조성을 위한 핵심 요소다. 기업의 일생을 놓고 볼 때 단계별로 투자가 성사되지 않을 경우 존립 자체가 어렵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글로벌 혁신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배경도 민간 투자자들의 탄탄한 자금줄 덕분이다. 시장에서 자율적 생태계가 형성돼야 스케일업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1996년에서 2001년 사이 발생한 닷컴 거품 붕괴 이후 미국의 나스닥과 벤처기업, VC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궤도로 진입했으나, 한국의 코스닥과 벤처기업, VC는 꽤 오랜 기간 빙하기를 거쳐야 했던 이유 역시 민간 주도 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부 주도 펀드보다는 민간 주도 펀드가, 민간 가운데서도 일반 VC보단 CVC 주도 펀드의 성과가 좋다는 사실은 이미 실리콘밸리를 통해 증명됐다. 이번에 조성되는 CVC 스케일업 펀드는 지난 3월 총 1,210억원 규모로 마련된 제1·2호 펀드의 후속 펀드로, 규모 면에서는 아쉽다는 평이지만 이를 통해 벤처 생태계가 활성화되고 경제 역동성이 높아질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다만, 외부자금 조달 및 해외투자 요건 완화 등 CVC에 겨눠진 규제 혁신은 풀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