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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AMAT 등 中 매출 감소로 실적 부진 美 당국·정치권 압박에 공급망에서 中 삭제 트럼프 집권 앞두고 반도체 장비 시장 한파
미국 정부의 대중국 수출 규제로 중국 매출이 급감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시장 예상치를 한참 밑도는 실적 전망치를 내놨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우려해 올해 상반기 반도체 장비를 사들이던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하반기 들어 주문량을 조절함에 따라 매출이 감소한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트럼프 행정부가 더 강력한 제재에 나설 경우 반도체 산업 전반으로 여파가 확산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ASML·AMAT·도쿄일렉트론, 내년 실적 부진 전망
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국의 반도체 장비기업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는 2024 회계연도 4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0억5,000만 달러(약 9조8,300억원) 증가했다. 이는 런던증권거래소가 집계한 컨센서스 69억5,000만 달러를 소폭 웃도는 수치다. 하지만 이날 AMAT가 내놓은 내년 1분기 매출 전망치는 71억5,000만 달러(±4억 달러)로 앞서 컨센서스 72억2,000만 달러에 못 미쳤다. 내년 가이던스가 전망치를 밑돌면서 이날 정규장에서 1.76% 오른 186달러로 거래를 마친 AMAT의 주가는 실적 공개 후 시간 외 거래에서 6% 가까이 급락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기업 ASML 역시 올해 3분기 주문량이 26억 유로(약 3조8,500억원)로 블룸버그가 집계한 시장 예상치 평균 53억9,000만 유로(약 7조9,7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2025년 순매출에 대한 회사 측 전망치도 300억~350억 유로에 그치면서 컨센서스(358억 유로)와 차이를 보였다. 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미국 정부의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조치가 실적 부진의 요인 중 하나"라며 "내년 중국 매출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산 첨단 칩과 반도체 장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수출 규제가 강화할 것이란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반도체 장비 시장의 수요가 요동치고 있다. 일례로 ASML의 경우 지난해 매출의 29%가 중국에서 나왔다. 올해는 1~3분기 중국 매출 비중이 47~49%까지 올랐는데, 이는 중국에 수출된 심자외선(DUV) 장비의 유지보수가 막힐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이후 중국 업체들이 주문을 늘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내년 중국 매출 비중은 20%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ASML은 예상했다.
세계 4위 반도체 장비기업 도쿄일렉트론 역시 중국 시장 매출 비중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회사 측은 올해 3분기 중국 매출 비중은 41%를 기록했지만 향후 이 수치가 30%대 초반까지 떨어질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같은 기간 중국 시장 매출액도 2,339억 엔(약 2조1,000억원)으로 직전 분기(2,770억 엔) 대비 15%가량 줄었다. 가와모토 히로시 도쿄일렉트론 수석 부사장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수출 규제 강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리스크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美, 中 기업과 협력하는 자국 기업에 대한 통제 강화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가 예상보다 빠르고 강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최근 미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ASML, AMAT, 도쿄일렉트론 등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체들에 중국 사업과 관련한 정보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면서 "중국은 미국, 한국, 대만을 합친 것보다 많은 반도체 장비를 구매하고 있다"며 "이는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 효과를 떨어뜨려 이웃 국가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공급망 내 중국 기업과 협력하는 자국 기업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미 상무부는 자국의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가 중국 공급업체에 기술 세부 사항과 계획을 공유하려면 라이선스를 취득하도록 하는 규정을 도입했다. 올여름부터는 중국 밖 공급업체도 모회사가 중국에 있으면 해당 규정을 적용한다고 못 박았다. 다만 이에 대한 유예 조치로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에는 내년까지 현재 공급업체를 유지할 수 있는 임시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이에 AMAT는 지난달 4일 자사 공급업체들에 '중국산 부품을 대체하지 않으면 공급업체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송했다. 해당 공급업체들은 투자자 주주 명단에도 중국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AMAT는 약 70개 공급업체 중 반도체 재료회사인 장쑤요커기술, 석영 가공 기업인 장쑤퍼시픽쿼츠, 정밀기계제조업체인 쿤산킹라이하이제닉머티리얼 등에서 직접 부품·장비를 공급받고 있다. 2차 벤더 이하로 내려가면 공급망에 포함된 중국 기업이 수십 개가 넘는다.
당국의 압박 속에 AMAT는 최근까지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상무부가, 지난 5월에는 매사추세츠주 지방검찰과 증권거래위원회(SEC)가 AMAT를 소환했다. 한국을 거쳐 중국 반도체 제조사 SMIC에 제조 장비를 수출했다는 혐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AMAT와 함께 세계 3대 반도체 장비 제조사로 꼽히는 램리서치, 반도체 처리시스템 개발사 비코 역시 공급업체에 새로운 중국산 부품 사용을 중단하고 내년 말까지 중국 공급업체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지침을 서면으로 보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美 보조금 축소·철회 우려도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향후 반도체 산업의 전망이 더욱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을 '적'으로 규정하며 경제적 대결과 탈동조화(디커플링)를 주장해 왔다. 반도체 등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중국을 압박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의 최혜국 지위를 박탈하고 필수 재화의 중국산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등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규제 강화와 고관세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난해 발표한 '어젠다 47'에서는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60%로 올리고 전체 수입품에 20%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반도체 장비 부문을 넘어 반도체 산업 전반으로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대응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의 한 유명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반도체과학법(CHIPS·칩스법)을 "정말 나쁜 거래"라고 비판하면서 "관세를 높게 매기면 부유한 회사들이 자발적으로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를 위해 칩스법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해 온 바이든 행정부와 달리 관세를 수단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칩스법을 통해 약속한 각종 보조금이 축소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가동을 목표로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약 23조6,400억원)를 들여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총 64억 달러(약 8조9,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상태다.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주에 후공정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데 38억7,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칩스법을 폐기하거나 보조금 규모를 축소한다면 미국 공장 건설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다만 트럼프 2기 정부가 실제로 보조금을 폐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칩스법이 사실상 트럼프 1기 정부에서부터 추진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예 뒤엎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게다가 해당 법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기업은 85억 달러(약 11조8,200억원)를 받기로 한 인텔을 포함한 자국 기업들인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자국 기업들이 예정된 칩스법 보조금을 완전히 받지 못할 경우 기업도 상당한 피해를 보는 데다 투자 유인도 줄어들기 때문에 이 같은 요인을 감안할 것이란 예상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 대중국 규제 속 반사이익 전망
관세 인상도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다. 최근 1년간 인공지능(AI) 붐 덕분에 미국 빅테크 업계에서 한국산 고성능 메모리의 몸값이 높아지면서 대미 반도체 수출액이 많이 증가했고 이는 트럼프 당선인이 경계하는 '미국 무역수지 적자'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현재 한국 반도체 제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관세가 면제되지만 향후 트럼프 정부에서는 국가안보나 불공정 무역을 이유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301조'를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견제는 국내 반도체 기업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도체 수출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 생산량의 28%를, SK하이닉스는 전체 D램의 40%를 중국에서 생산한다. 이들 제품이 중국산으로 분류돼 미국 수출 시 관세 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중국 견제에 따른 반사이익도 기대된다. 중국 경쟁사가 주춤하는 사이 국내 기업이 반 박자 정도 앞서 나갈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인프라 확장보다는 기술력 확보로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최근 초심으로 돌아가 기술력 확보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삼성전자의 행보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3분기 실적 부진을 기록한 삼성전자는 AI 반도체인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3E 8·12단 제품의 고객사 납품 지연을 비롯해 파운드리, 스마트폰, PC 등 시장 수요마저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지난달 3분기 실적 발표 당일 반도체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은 주주들에게 보낸 사과문을 통해 반도체 사업의 위기 극복 전략으로 '기술 혁신'을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