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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인선 끝나자마자 초강경 관세정책 예고 트럼프 재임 시절 발효된 USMCA 위반 소지 무관세 혜택 韓 기업들, 공급망 재편 비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옛 NAFTA) 회원국인 멕시코와 캐나다의 모든 상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한국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완성차회사와 가전업체는 멕시코에, 배터리회사는 주로 캐나다에 생산기지를 마련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통상당국과 경제계는 무차별 통상 압박의 여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까지 미치진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미 수출국 겨냥한 '관세 폭탄'
27일 산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25일(이하 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내년) 1월 20일 첫 행정명령 중 하나로 멕시코와 캐나다로부터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가 대선 승리 후 구체적인 관세 정책 계획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트럼프는 대선 기간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적 관세를, 중국산 제품에는 6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일각에선 실현 가능성에 물음표를 붙였다. 하지만 이날 발표로 관세 공약 실천 의지를 재확인했다.
주목되는 부분은 미국의 오랜 우방으로 평가되는 캐나다에도 관세 칼날을 겨눴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에도 가치보다는 손익 관점에서 동맹국들을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즉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정치적 득실을 위해서라면 동맹국을 쉽게 압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셈이다.
또한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무역수지를 염두에 둔 관세 정책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멕시코와 중국, 캐나다는 올해 9월 기준 미국 수입품의 42%를 차지하는 3대 대미 수출국이다. 만약 트럼프가 거대 대미 수출국을 겨냥해 이번 관세를 발표한 것이라면, 향후 다른 대미무역 흑자국들을 향해서도 비슷한 행보를 취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한국 역시 트럼프발 관세 공세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한국은 미국의 주요 우방으로 자리잡았으나, 대미 무역흑자 규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국가다. 앞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한미 FTA를 재개정했지만, 보편관세 부과나 추가협상 요구를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멕시코·캐나다에 생산거점 둔 韓 기업들 타격
더욱이 이번 관세 폭탄 예고로 멕시코와 캐나다에 생산기지를 둔 국내 기업들의 셈법도 복잡하게 됐다. 멕시코와 캐나다는 최근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 과정 속 니어쇼어링(인접국으로의 생산기지 이전)의 최대 수혜지로 주목 받아왔다. 특히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의 경우 USMCA 적용으로 관세가 붙지 않는다. 이에 두 나라에는 완성차 및 부품, 가전 업체 등을 중심으로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해 있는 상태다.
하지만 무관세가 폐지되면 관세가 고스란히 생산원가에 반영돼 수익성 악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기업 중 삼성전자는 멕시코시티와 케레타로 등에, LG전자는 레이노사, 몬테레이, 라모스 등에 TV와 냉장고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주요 기업은 관세 인상이 현실화할 경우 멕시코에서 만든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것보다 미국 공장 생산량을 늘려 현지 생산·판매에 나서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는 판단에 내년 사업계획 전면 수정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업계도 비슷한 상황이다. 기아는 멕시코 누에보레온주에서 연간 25만 대의 차량을 생산해 약 15만 대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이 공장에선 현대자동차 차종도 생산하고 있다. 두산밥캣과 포스코인터내셔널 등도 미국 수출을 목적으로 각각 소형로더, 구동모터코어 공장을 새로 짓거나 증설하고 있다.
캐나다에 공장을 짓고 있는 업체는 LG에너지솔루션(배터리·미국 스텔란티스와 합작), 포스코퓨처엠(양극재·미국 제너럴모터스와 합작), 에코프로비엠·SK온(양극재) 등이다. 이들 기업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혜택을 염두에 두고 무관세인 캐나다를 북미 거점으로 점찍었지만, 트럼프의 관세 폭탄 발언이 현실화하면 캐나다 공장 수익성이 대폭 떨어질 수 있어 사업 계획 재조정이 불가피하다.
멕시코 '보복 예고', 캐나다는 '우호적 논의'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이번 경고가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연 것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그간 트럼프는 관세를 올리면 세수가 늘고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펜타닐이나 월경자 단속 문제를 관세 부과 이유로 제시하면서 비경제적 분야의 정책을 놓고도 관세를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트럼프가 재무장관으로 지명한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는 최근 폭스뉴스 기고에서 "관세는 대통령의 대외 정책 목적 성취에 유용한 도구"라고 했다. 그는 동맹들의 방위비 증액, 시장 개방, 무단 월경과 펜타닐 거래 차단 협력 등을 얻어내는 데 관세가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밝혔다. 트럼프와 측근들 사이에서 관세를 대외 정책의 주요 무기로 쓰자는 공감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가운데 멕시코 정부는 무역 보복을 암시하고 나섰다. 26일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이민 문제나 마약 소비 문제를 국가 간 위협이나 관세로 다루는 것은 옳지 않다"며 "한 관세가 다른 관세에 대응해 부과될 것이고, 이런 식으로 보복이 계속된다면 우리 스스로는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관세를 매긴다면 멕시코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어 셰인바움 대통령은 "멕시코는 대표적으로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들과 큰 무역 관계를 맺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관세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미국과 멕시코에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면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는 25일 대책 마련을 위해 주지사들과의 긴급회의를 소집한 뒤 곧바로 트럼프와의 통화에 나서 무역에 대한 국경 안보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6일 오전 트뤼도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캐나다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우리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경우 “무역 전쟁과 관세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며 트럼프 쪽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