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 왕실과 국민의 수명 격차가 보여주는 은퇴 설계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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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수명 격차, 책임이 만든 유스트레스 효과 은퇴, 고정 연령이 아닌 의미와 회복을 담은 설계 필요 후기 경력 일자리, 과로 방지와 도전의 균형이 핵심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8~19세기 유럽의 군주는 일반 백성보다 평균 20~30년을 더 오래 살았다. 보건 수준이 향상되면서 격차는 줄었지만, 여전히 뚜렷한 차이가 남았다. 왕과 여왕은 같은 환경에서 지낸 형제자매나 배우자보다 오래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더 나은 의료가 아니라 왕관이 부여하는 목적의식과 책임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즉 ‘유스트레스(eustress)’였다. 이는 부정적 스트레스와 달리 관리 가능하며 건강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1669년부터 2022년까지 군주 수명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전체 기대수명이 높아진 오늘날에도 군주는 여전히 초과 수명을 유지한다. 이는 해로운 스트레스와 건강한 도전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은퇴 제도 역시 단순한 연령 규정이 아니라, 후기 경력의 일자리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다시 묻고 있다.

은퇴 제도의 재설계
은퇴 논의의 핵심은 일을 없애거나 노동을 미화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정된 연령 규정을 넘어 자율성과 책임, 회복의 여지를 담은 ‘설계된 유스트레스’로 제도를 전환하는 것이다.
심리학과 노화 연구는 이 방향을 뒷받침한다. 이른바 ‘골디락스 곡선’은 스트레스가 너무 적으면 기능이 쇠퇴하고, 너무 많으면 건강을 해치지만, 적절한 수준에서는 오히려 면역력이 강화되고 인지 기능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위험은 존재하지만 감당 가능한 도전이 건강을 지탱한다는 의미다.
정책도 같은 원리를 따라야 한다. 후기 경력의 일자리는 이 적정 지점에 놓이도록 설계돼야 한다. 실제로 선진국에서는 60대 후반, 70대 초반까지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인구가 늘고 있다. 중요한 점은 단순히 일을 오래 붙잡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유연하며 인간적인 방식으로 경력을 이어가도록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왕실이 남긴 교훈
왕실 사례는 부와 목적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왕족 모두가 특권을 누렸지만, 실제 책임을 진 이는 군주뿐이었다. 이 책임이 유스트레스를 만들어 수명을 늘린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왕실 프리미엄’은 19세기에 정점을 찍은 뒤 줄었지만, 같은 가문 안에서도 군주와 친족 간의 수명 차이는 여전히 남았다. 이는 건강을 설명할 때 소득이나 의료 접근성뿐 아니라 개인의 주도성도 중요한 요소임을 시사한다.
생물학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셀 메타볼리즘(Cell Metabolism)*에 발표된 논문들은 인지적 도전, 운동, 온도 변화, 단식 같은 경미한 스트레스가 뇌와 신체의 보호 기제를 활성화한다고 밝힌다. 세포 에너지 대사를 조절하는 AMPK, 노화 억제 단백질인 서투인, 스트레스 방어 기능을 하는 열충격 단백질이 대표적이다. 이 신호들은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강화해 회복력과 건강을 지탱한다. 다만 이런 효과는 회복 과정이 뒷받침될 때 유지된다. 따라서 직무 설계에서도 속도 조절, 강도의 다양성, 충분한 회복 시간을 보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주: 연도(X축), 수명 차이(=왕실 인물의 사망 연령 − 동시대 일반 인구 기대수명)(Y축)
스트레스와 목적의 균형
스트레스는 지나치게 적으면 기능이 쇠퇴하고, 지나치게 많으면 건강을 해친다. 그러나 적절한 수준에서는 오히려 면역력이 강화되고 인지 기능이 유지된다. 연구는 목적이 노년 건강의 중요한 보호 요인임을 보여준다. 사회경제적 지위를 감안하더라도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은 기능 저하가 늦고 사망 위험이 낮다. 의미 있는 일이 목적을 키운다면, 잘 설계된 후기 경력은 건강 수명을 늘릴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2025년 세계경제전망 역시 50세 이상 인구의 인지·신체 능력이 뚜렷이 향상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오늘날 70세는 과거와 다르다. 물론 개인별 격차는 존재하지만, 한계는 생물학이 아니라 제도의 경직성에서 비롯된다. 고정된 은퇴 연령 규정을 바꾸면 후기 경력의 일자리에서 유스트레스를 통한 장수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주: 스트레스 수준-부족, 낮음, 적정, 높음, 과부하(X축), 건강 수명 반응 지수(Y축)
은퇴, 부담에서 도전으로
은퇴 시점과 사망률의 관계는 연구마다 다르다. 1967년 스페인 연금 개혁 분석은 은퇴 지연이 75~85세 사망률을 높였다고 보고한 반면, 육체노동 직종에서는 은퇴가 건강 개선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연구는 조기 은퇴가 오히려 사망률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오래 일했느냐가 아니라, 일의 성격과 조건, 개인의 상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획일적 은퇴 연령이 아니라, 후기 경력을 유스트레스에 맞게 설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특히 정기적인 휴지기, 프로젝트 중심의 짧은 안식년 등 회복 장치를 포함해야 한다. 이는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성찰의 균형을 맞춰 전문성을 높인다. 또한 의사결정 피로를 줄여주는 보조 인력, 업무 설계 지원, 디지털 도구 같은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도전이 불안이 아니라 학습으로 이어지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뒤따라야 한다.
형평성과 정책적 대응
유스트레스의 혜택은 모든 직종에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육체노동이나 통제권이 낮은 직무에서는 오히려 장시간 근무가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정책은 고강도 직종의 조기 은퇴를 보장하는 동시에, 후기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이들에게는 유연한 일자리로 전환할 길을 마련해야 한다. 유럽연합(EU)의 2024년 고령화 보고서와 새 지침도 노동 수명 연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직종별 격차 해소를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비판도 있다. 건강한 사람만 오래 일한다는 ‘건강 노동자 효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군주의 사례는 태생적으로 지위가 주어졌기 때문에 선택에 따른 결과가 아니며, 단순히 건강한 사람만 오래 일한다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 생물학 연구는 일정 수준의 도전과 자율성이 건강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로 위험이 뒤따른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제안의 핵심은 단순히 일을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새롭게 설계하자는 것이다. 비용 문제 역시 거론되지만, 경험 많은 인력이 몇 년 더 기여하고 그 과정에서 건강 개선으로 장기 의료비가 줄어든다면, 이는 이직과 지식 손실로 인한 비용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목적 있는 책임이 만든 장수
국제통화기금(IMF)은 노년층의 건강한 노동 참여가 장기적으로 노동 공급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따라서 후기 경력 구조를 책임과 의미 중심으로 설계해 효과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군주의 사례는 수명이 관리 가능한 책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은퇴의 절벽 대신 자율성과 도전, 회복을 보장하는 점진적 경로가 요구된다. 경험을 제도로 남길 수 있는 직위를 확대하고, 기여 중심 평가를 도입하며, 이를 계약과 예산에 반영해야 한다. 후기 경력 유지율, 멘토링 시간, 회복 지표, 건강 결과 같은 성과를 추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령화 사회는 책임과 목적을 공동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 개인은 그 속에서 자율성과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왕실의 장수 비밀은 궁전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책임 속에서 발휘된 자율성이었다. 이제 그 원리를 제도 속에 심어야 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Case for “Designed Stress”: Why Later, Flexible Retirement Can Add Years to Life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