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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애리조나 1공장 본격 가동
일본 구마모토현 3공장 적극 검토
기술에서도 저만치 앞서가는 행보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가 미국과 일본, 독일 등 해외 공장 건설에 속도를 높이며 공급망 다변화를 서두르는 모습이다. 업계는 TSMC의 적극적 행보가 각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국내 생산 시설 확대에도 애로를 겪는 우리 기업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상황이다.
보조금부터 인력 확보까지 각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
12일(현지 시각) 미 상무부에 따르면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사업에서 이정표가 될 것”이라며 TSMC의 애리조나주 1공장 4나노미터(nm) 칩 생산 개시 소식을 알렸다. 러몬도 장관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땅에서 최첨단 4nm 칩을 생산하고 있다”며 “수율과 품질 면에서 대만과 동등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들어서는 TSMC 공장은 이번 1공장 외에도 2개가 더 있다. 3nm 공정의 두 번째 공장은 2028년 완공을 목표로 했으며, 세 번째 공장의 경우 미세한 공정을 도입하는 만큼 2029년 이후 완공이 유력한 상황이다. 미국 정부는 이들 세 공장에 66억 달러(약 9조6,386억원)의 보조금과 최대 50억 달러(약 7조3,010억원)의 저금리 대출을 지원할 계획이다.
TSMC는 일본 구마모토현에도 총 86억 달러(약 12조5,594억 원)를 투자해 두 개의 공장을 운영할 계획이다. 12~28나노미터(nm) 공정으로 소니의 이미지 센서를 생산하는 1공장은 지난해 12월 생산을 시작했으며, 2공장은 2027년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일본 정부의 지원은 1공장에 4,760억 엔(약 4조3,964억원), 2공장에 최대 7,320억 엔(약 6조7,601억원) 수준이다. 현재 구마모토현은 제3공장 유치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또한 TSMC의 주요 생산 거점이 될 전망이다. TSMC 최근 독일 드레스덴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27년 완공을 목표한 TSMC 드레스덴 공장에는 총 100억 유로(약 15조442억원)의 자금이 투입되며, 이 가운데 절반인 50억 유로(약 7조5,221억 원)를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EU)이 지원한다. 독일 연방경제기후보호부는 지난해 8월 “TSMC 투자 유치로 유럽 자동차 산업의 반도체 공급망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업계는 TSMC의 해외 투자가 순항 중인 배경으로 각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꼽았다. 미국과 일본, 독일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장 운영에 필요한 인프라와 인력 확보 등을 도우면서 차질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해외 거점을 확대하며 ‘업계 1위’ 굳히기에 나선 TSMC와 대규모 생산 시설 유치로 일자리 및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적절히 맞아떨어진 셈이다.
유례없는 속도전에 일본 ‘깜짝’
TSMC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 의지는 빠른 건설 속도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지난해 2월 준공돼 연말 가동에 들어간 일본 구마모토 1공장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공장은 일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속도전으로 평가받는다. 애초 5년은 걸릴 것이라던 건설 기간을 절반 이상 단축해 2년 안에 마치면서다. TSMC는 완공 시점을 앞당기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365일 24시간 공사에 돌입했으며, 착공부터 완공까지 걸린 시간은 22개월에 불과했다.
완공 전후 시험 생산을 거쳐 지난해 12월 구마모토 1공장 가동에 들어간 TSMC는 곧장 2공장 건설에 착수했고, 3공장 건설 또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차량에서 슈퍼컴퓨터에 이르는 파운드리 전 분야를 소화하겠다는 의지다. 일본 내에서 자국의 반도체 소재 및 장비 생산력에 TSMC의 대규모 설비까지 들어서면 단숨에 세계 정상급 반도체 산업 인프라를 갖추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 하늘을 찌르는 배경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반도체 산업은 인프라 구축에 연일 애를 먹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2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계획을 발표하며 그 첫 단계로 415만㎡(약 126만 평) 규모 SK하이닉스 공장 건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해당 공장은 2022년 착공할 거라는 처음 계획에서 3년가량 늦춰져 올해 3월 첫 삽을 뜰 예정이다. SK하이닉스 용인 공장의 가동은 아무리 빨라도 2027년 하반기가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기술력에서도 ‘제자리걸음’
삼성전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3년 3월 용인 클러스터 투자 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은 내년이 돼서야 착공할 수 있을 전망이다. 공사 시작이 늦어지면서 가동 또한 연기돼 본격적인 양산은 2030년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TSMC와의 시장 점유율 격차를 벌린 삼성전자로서는 TSMC가 저만치 앞서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의하면 지난해 3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시장 점유율은 9.3%로 1위 TSMC(64.9%)와 55.6%p의 격차를 기록했다. 이는 직전 분기(50.8%p)보다 훨씬 확대된 수치다.
기술력에서도 삼성전자는 TSMC에 비해 한발 뒤처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2022년 파운드리 업계에선 처음으로 전류 제어가 정밀하고 전력 효율이 뛰어난 반도체 공정 기술 ‘게이트올어라운드(GAA)’를 도입할 정도로 적극적인 삼성전자지만, 양품 비율인 수율 향상에는 실패해 대형 고객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를 두고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오늘날 삼성전자는 기술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첨단 기술에서 앞서 있을지는 몰라도, 양산 단계에서 높은 수율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문제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쟁 업체들의 급성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도 삼성전자와 TSMC의 명운을 갈랐다. 대만 경제전문가 셰진허 재신미디어 회장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삼성전자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2005년 이전 30%를 넘었으나, 이후 급격히 하락해 0.3% 수준으로 내려왔다”며 “이는 중국이 참여하는 세계화 속에서 산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삼성전자와 TSMC는 과거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나, 현재 TSMC의 시가총액은 삼성전자 시총의 4배에 달한다”며 “결국 최종 승자는 기술 장벽을 높여 중국이 따라올 수 없게 만든 기업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