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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와 5억 달러 합의금 협상 착수 내부 반발 속 다양성 프로그램 축소 움직임 정치 권력 수용에 따른 학문 자율성 우려 고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충돌해 온 미국 명문 하버드대가 5억 달러(약 6,960억원) 규모의 벌금을 납부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반(反)유대주의 대응을 두고 트럼프 행정부와 강대강 대치를 이어왔지만 보조금 지급 중단 등 강경 조치를 내세운 트럼프 측의 압박에 결국 백기를 든 셈이다. 이에 교육계에서는 정치 권력과의 타협이 학문적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 고등교육의 정체성마저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버드대, 합의금 검토
7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는 이 사안에 정통한 4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하버드대가 백악관과의 갈등을 마무리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5억 달러 지출 요구에 응할 의향을 내비쳤다”면서 “하버드대는 연방정부에 직접 돈을 지급하는 방식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으나, 구체적인 재정 지출 조건을 놓고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하버드대가 유대인 학생 보호에 미온적으로 대응해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 제6조를 위반했다며,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해 왔다. 1964년에 제정된 민권법은 인종, 민족, 출신 국가, 종교,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제6조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인종, 피부색, 출신 국가 등을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협상의 구체적인 조건과 정확한 일정에 대해 하버드 측은 즉각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NYT는 “정부와 하버드가 언제쯤 합의에 도달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면서도 “하버드대는 지난 4월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연방 소송과 이번 합의를 연계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당시 하버드대는 트럼프 행정부가 대학 내 정책 변경을 요구하며 보조금 지급을 중단한 데 대해 이를 중단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내부에선 이미 몇 달 전부터 승소 여부와 관계없이 트럼프 임기 중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선 합의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연방 민권법에 따르면 이를 위반한 학교는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없고, 만약 보조금을 복구하려면 합의금 지불과 정책 변경을 포함하는 ‘자발적 시정 합의’를 해야 한다.

교내 DEI 정책 후퇴
대학 측이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내 기류도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관련 프로그램 명칭이 점차 사라지는 등 해당 정책들의 상징적 후퇴가 감지되는 분위기다. 학교 측은 이를 ‘용어 재정립’이라 설명하지만, 대다수 구성원들은 이를 정치권과의 긴장 완화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조정이 정치적 타협의 전초라면 하버드는 미국 고등교육의 철학적 좌표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학계 전반에 대한 공세를 노골적으로 강화해 왔다. 예산 축소, 행정 감사, 법적 압박, 공개적 비판까지 다각적 수단을 동원해 고등교육 기관을 ‘이념적 조정 대상’으로 삼아 왔다. 하버드는 그 공세의 정점에 놓인 상징적 존재다. 트럼프 진영 입장에서 하버드와의 타협은 단순한 협상이 아닌, 학계 전반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규범 전환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하버드 내부에서도 이미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일부 교수진은 “정치적 거래는 학문적 자살행위”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학생들 사이에서도 대학이 스스로 비판적 지성을 포기하고 ‘권력과 공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특히 DEI 정책의 후퇴는 단순한 표식 제거를 넘어, 제도적 진전이 역행하는 신호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권력 수용 속 자율성 훼손 우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고등교육 기관들이 정치적 위협과 재정 압박 속에서 어떤 균형점을 택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내 다수의 대학들이 이미 운영비 부담과 정치권의 감시 강화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하버드의 선택은 향후 수많은 교육 기관의 전략적 기준점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하버드는 그 상징성과 영향력으로 인해 선택의 파장이 특히 크다. 만약 하버드가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협약을 수용할 경우, 이는 대학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문적 리더십’의 개념 자체를 사회적으로 다시 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학문 기관이 거대 정치 권력과 재정 자본의 접촉면을 넓히는 상황에서 비판적 독립성과 이념적 중립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가 고등교육의 쟁점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결국 핵심은 대학이 외부 권력과 재정적 이해를 주고받으면서도 학문적 자율성과 비판적 기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다. 다만 이 선택이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든 그 결과는 곧 미국 대학이 품은 자율성의 한계이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고등교육이 감당할 수 있는 독립성의 최종 윤곽을 드러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