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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1,000억 불 투자 발표자리서 폭탄 선언 "미국 생산 기반 있거나 약속한 기업엔 면제" 관세 부과 시 美 IT 산업도 타격 불가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가 포함된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0%의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만 미국이 첨단 반도체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가운데,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생산라인이 현지에 부족하다는 점, 트럼프가 “미국 내 생산 시설을 건설 중인 기업은 예외로 할 것”이라고 밝힌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 기업의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특히 전문가들은 반도체 대부분을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이 반도체에 100%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자국 IT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美 생산 중이거나 생산 약속하면 면제"
6일(이하 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애플의 대미 시설투자 계획 발표 행사에서 “반도체와 칩(부품 또는 소자)에 대해 약 100%의 관세를 부과할 예정”이라며 “미국 내에서 제조 중이거나, 확실하게 미국 내 생산을 약속한 기업에는 부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어 “공장을 짓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짓지 않는다면, 그때 누적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차례 반도체 관세를 예고해 왔지만 관세율을 공개한 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애플이 향후 4년간 미국에 1,000억 달러(약 138조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나왔다. 관세 면제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미국 내 제조 비율이나 구체적인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철강과 자동차 등에 대한 품목 관세를 발표했고 반도체와 의약품 등에 대해서도 조만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해 왔다. 다만 구체적인 관세율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0% 관세는 철강·알루미늄(50%), 구리(50%), 자동차(25%) 등 기존에 부과한 품목보다 월등히 높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와 같은 한국 반도체 기업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는 한국의 대미 수출 품목 중 자동차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미 반도체 수출액은 106억 달러(약 14조7,000억원)였다. 특히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는 반도체에 대한 100% 관세를 면제받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격 경쟁력에서 TSMC에 더욱 뒤처질 수밖에 없다.

시스템반도체는 관세 면제 유력, D램·낸드는 우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내부적으로 반도체 관세 100%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양사는 모두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거나 생산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 해외 기업은 물론 마이크론, 글로벌 파운드리,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도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연구·개발(R&D) 시설을 유치하기 위한 '반도체 및 과학법'(칩스법) 시행에 따라 미국 내 대규모 공장 건설을 약속하고 보조금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1996년부터 텍사스 오스틴 팹을 착공해 D램을 생산했고,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한 이후에는 시스템 반도체를 중심으로 생산하고 있다. 또 오스틴 인근 테일러시에 총 370억 달러(약 51조원)를 투자해 최신 파운드리 팹과 R&D 시설을 지을 예정이다. 테일러 팹은 현재 장비 반입을 진행 중이며, 내년 준공돼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 달러(약 5조3,000억원)를 투자해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및 R&D 시설을 짓기로 했다. 아직 착공 전이며, 2028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공장들은 테슬라 자율주행칩, 구글·아마존용 칩 등 첨단 제품의 생산 거점이다. 트럼프 발언에 따르면 시스템 반도체는 관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한국(화성·평택), 중국(시안) 등에서 생산되고 있어 고율 관세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D램과 낸드플래시를 한국 이천·청주 공장뿐 아니라 중국 우시(無錫)와 다롄(大連) 공장에서도 생산 중이다. 이들 제품이 미국 시장으로 수출되거나 미국 기업에 공급될 경우, 100% 관세가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아직 트럼프 대통령의 반도체 관세가 구체화되지 않긴 했지만, 반도체 미국 생산을 압박하고 있는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 메모리 반도체 수출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한국은 지난달 30일 미국과 무역 협상에 합의하며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에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된 만큼 국내 반도체 기업은 관세 대상에서 예외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7일 트럼프의 발언을 두고 “우리는 이번에 (관세) 협상을 타결하면서 미래의 관세, 특히 반도체나 바이오 부분에 있어서는 최혜국 대우를 받기로 했다”면서 “다시 말해 다른 나라에 주는 것과 결코 불리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 만약 15%로 최고 세율이 정해진다고 하면 우리도 15%를 받는 것이다. 100%가 되든 200%가 되건 상관없다”고 말했다.
반도체 관세 폭탄, 미국 산업에 역효과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반도체 고율 관세가 미국에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미국 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미국 비영리 연구소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보고서 '반도체 관세, 미국 경제와 디지털 산업 리더십에 치명타(Short-Circuited: How Semiconductor Tariffs Would Harm the U.S. Economy and Digital Industry Leadership)'를 보면, 미국으로 들어오는 반도체에 25% 관세 부과가 부과될 경우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 가격이 상승해 소비가 위축되고, 초기에는 38억 달러 규모의 구매가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 CNN이 지난달 15일 보도한 기사 '트럼프 관세, 미국 소비자 물가에 미치는 충격(Here’s how Trump’s tariffs could be impacting prices for US consumers)에 따르면 미국 내 컴퓨터와 주변기기 가격은 3개월 연속 상승해 1.4% 올랐다. 이는 2024년 1월 이후 최대 월간 상승 폭이다. 반도체 관세가 본격 적용되기도 전에 이미 전자제품 가격 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보고서는 또 반도체 가격이 22% 인상되면 자동차 가격이 최대 800달러(약 110만원) 인상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20배 많은 반도체가 필요해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반도체 관세가 미국의 인공지능(AI)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관세로 인해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칩 가격이 오르면,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클라우드 기업들은 서비스 요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는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의 기업은 AI 훈련(데이터축적 등) 비용이 증가하게 되고, 결국 투자 축소로 이어져 미국의 AI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