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가계가 부담하는 대학, 성과로 재편되는 고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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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부담이 절반에 이른 일본 고등교육의 시장화 현실 인구 감소 속 성과 중심으로 재편되는 정부 재정 전략 대학 통합과 정보 공개를 통한 교육 품질·기회 균형 모색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고등교육 재정 구조는 이미 시장 논리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다. 대학 운영비의 절반을 가계가 직접 부담하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0%를 크게 웃돈다. 정부 재원이 축소된 자리를 가정이 메우는 구조 속에서 대학은 공공기관이면서 동시에 가격이 매겨진 서비스로 작동한다. 등록금 수준과 재정 여력은 입학 경쟁률과 졸업률, 대학의 존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인구 감소와 한정된 예산이다. 18세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모든 대학에 재정을 고르게 나누면 ‘학생 한 명당 더 큰 비용으로 더 낮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부가 현재의 대학 수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지원을 이어가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낮은 졸업률과 빠르게 변하는 노동시장 환경을 고려하면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고등교육의 새로운 계산법
한때 고등교육은 ‘학위가 많을수록 성장과 기회가 커진다’라는 단순한 공식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 공식만으로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OECD에 따르면 대학 학위의 개인적 수익률은 여전히 높지만, 졸업률은 낮고 학위 취득까지 걸리는 기간은 길다. 학사과정 학생 가운데 정해진 기간 내에 학위를 받는 비율은 43%에 불과하며, 몇 년을 더 주어도 70% 수준에 머문다.

주: 졸업률(X축), 시점(Y축)/정규 학업 기간 내 졸업(연한 빨강), +1년 이내 졸업(중간 빨강), +3년 이내 졸업(진한 빨강)
이처럼 졸업률이 낮은 상황에서 입학 인원을 기준으로 예산을 배분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입학 단계가 아니라, 실제로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졸업생 한 명을 길러내는 데 드는 비용을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등교육 재정의 기준은 학생 1인당 투입 비용이 아니라 졸업생 1인당 성과 비용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국립대학의 연간 등록금은 약 53만5,800 엔(약 480만원)이며, 사립대는 이보다 두 배가량 높다. OECD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고등 교육비 중 가계 부담은 50%, 정부 부담은 37%로 선진국 평균보다 높다. 부담이 커질수록 가정은 전공의 질, 취업률, 졸업 소요 기간 등 실질적 성과를 기준으로 대학을 평가한다. 이런 환경에서 보편적 보조금보다 성과 중심의 차등 지원이 더 효율적이라는 분석이 확산되고 있다.

주: 공공 재원 비율(X축), 비교 대상국-OECD, 일본(Y축)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의 생존 압박
저출산은 이미 고등교육 체계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명, 2024년 0.75명으로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출생아 감소는 곧 신입생 감소로 연결되며, 다수의 대학이 존립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대학 입학자 수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고 분석한다.
정원이 남는 대학은 경쟁력 강화와 기준 완화 사이에서 갈림길에 선다. 후자를 택하면 ‘디플로마 밀(diploma mill)’, 즉 학위를 대량 생산하는 구조가 나타난다. 대학은 재정 유지를 위해 등록금 의존도를 높이지만, 교육 수준은 떨어지고 졸업생의 고용률은 낮아진다. 미국 고등교육인증협의회(CHEA)는 이를 막기 위해 교육 수준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구 감소 시대에 교육의 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의미다.
반면 중국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학위는 늘어나지만, 일자리가 부족하다. 2025년 대학 졸업자는 약 1,222만 명으로 사상 최대가 될 전망이지만, 청년 실업률은 16%대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학위의 경제적 가치는 떨어지고, 일부 전공은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문제는 교육의 양이 아니라 산업 수요와의 불일치다. 교육이 시장 원리로 작동한다면 정부는 품질을 관리하고 공급량을 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의 신뢰는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선택과 집중, 경쟁으로 재편되는 공공지원
정부의 고등교육 재정 정책은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핵심은 재정 지원을 확대하되, 성과가 입증된 대학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방향이 제시된다.
첫째, 공공 재원을 소수의 경쟁력 있는 대학에 집중하는 것이다. 교육 수준, 정상 학기 내 졸업 비율, 졸업 후 임금 상승효과가 높은 대학을 중심으로 재정을 배분하고, 성과가 낮은 학과나 기관은 통폐합한다. 이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둘째, 핵심 대학의 교원을 경쟁력 있게 대우해야 한다. 인공지능(AI), 에너지, 바이오 등 국가 전략 분야는 인재 확보가 곧 정책의 성패를 좌우한다. 우수 연구 인력이 떠나지 않도록 급여와 연구 여건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재정지원 기준을 학생 1인당 비용에서 졸업생 1인당 비용으로 전환해야 한다. 졸업과 취업 등 실질적 성과를 중심으로 예산을 조정하면 세금이 결과를 반영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정책이 교육 기회를 축소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제도 설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단기·저비용 직업과정, 성인 재교육, 역량이 입증된 학습자의 재진입 경로를 마련하면 형평성을 유지할 수 있다. OECD 분석에 따르면 학위의 경제적 가치는 산업 구조와 노동 수요에 따라 다르다. 수익률이 낮은 전공은 축소하거나 개편하고, 사회적 수요가 높은 분야에는 저소득층·우수 학생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축소가 아니라 같은 예산으로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공정한 입학과 정보 공개
재정이 소수 대학에 집중될수록 입학의 공정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대학 입시는 모호한 평가에서 벗어나, 명확하고 검증 가능한 역량 중심 체계로 전환돼야 한다. 학위 과정으로 이어지는 브리지 프로그램(Bridge Program) 역시 대기 구간이 아니라 실제 학점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운영해야 한다. 상담 지원, 학점 설계, 중간 보충 제도, 긴급 재정 지원 등은 중도 탈락을 줄이고 교육의 형평성을 보완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대학의 책임성과 투명성 또한 강화돼야 한다. 입학 기준, 졸업 비율, 평균 졸업 기간, 졸업 후 3년간 중위소득 등 주요 지표를 공개하면 학생과 가정은 교육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이는 학생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검증받기 위한 절차다.
등록금 구조 역시 명확해야 한다. 대학은 연간 등록금뿐 아니라 졸업까지의 총비용과 평균 졸업 기간을 공개해야 한다. 이는 숨겨진 비용을 줄이고, 학생과 학부모가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최소한의 장치다. 교육이 시장 원리 속에서 운영된다면 정보의 투명성은 공정성의 출발점이다.
일본·한국·중국이 던지는 세 가지 메시지
세 나라의 경험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대학의 수를 줄이고 교육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일본의 과제는 분산된 대학 체계를 정비하고 연구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부과학성(MEXT)에 따르면 대학 전체 등록자는 여전히 높지만, 학부생 수는 감소세이고 단기대학은 빠르게 줄고 있다. 따라서 대학 간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조치로 평가된다. 경쟁력이 낮은 학과는 정리하고, 연구와 취업 실적이 우수한 전공을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장학금은 학업 능력이 검증됐지만 재정이 어려운 학생에게 우선 배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은 상황이 더 시급하다. 출산율이 다소 회복되더라도 학령인구 감소는 이미 불가피하다. 대학 통폐합, 유휴 캠퍼스 활용, 성인 학습자와 유학생 유치 등 다각적 대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핵심은 교육의 수준 유지다. 예산을 무분별하게 확대하면 교육 품질이 낮은 대학이 늘어나고 전체 경쟁력이 떨어진다. 재정을 역량 있는 대학에 집중하고 직업교육과 기술훈련을 강화해야 임금 수준과 사회 신뢰를 지킬 수 있다.
중국은 교육과 일자리의 불균형이 가장 큰 문제다. 정부는 취업률과 임금 수준이 높은 전공에 재정을 집중하고, 실적이 낮은 분야는 재편해야 한다. 고등교육의 양적 확대보다 노동시장과의 연계 강화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교육의 품질과 기회의 균형
일본에서 고등 교육비의 절반을 가정이 부담한다는 사실은, 재정 구조의 중심이 국가에서 가계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교육의 가치와 성과가 더욱 엄격히 평가받고 있다. 낮은 수준의 학위는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한정된 공공 예산은 효율성을 요구받는다.
이제 고등교육은 상품의 투명성과 공공재의 형평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재정은 결과와 책임에 따라 배분돼야 하고, 제도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접근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학업을 중단한 이들이 다시 교육의 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대학의 수를 줄이되 남은 대학에는 충분한 자원을 투자하고, 명확한 성과를 요구해야 한다. 지원은 등록 인원이 아니라 졸업과 고용 성과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무분별한 확장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교육의 품질을 높이고 기회의 문을 넓히는 두 과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고등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Higher Education as a Commodity or a Right? Funding Excellence in the Demographic Crunch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