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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치이고 사우디에 치이는 석유화학, 한국 '대위기' 맞나 기반 시설 매각 나선 기업들, 하지만 "제값 주고 팔긴 어려울 듯" 원천기술 개발 중요성 부각되지만, "R&D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 아냐"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대위기에 몰렸다. 중국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자급률이 하늘을 뚫은 데다, 최근엔 중동 업체들까지 석유화학에 진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가 경쟁력이 높은 중국과 저가원료를 기반으로 한 중동을 딛고 일어서기에 한국의 기술력은 뒤처지기만 한다. 결국 감당하기 힘든 수준까지 몰리면서 국내 기업들은 석유화학 기반 시설 매각 작업에 돌입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모양새다.
'효자' 노릇하던 석유화학, 이젠 장기 불황 우려까지
지난 2년간 불황이 이어진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이젠 구조적 장기 불황까지 걱정해야 할 위기에 빠졌다. 중국이 자급률 제고와 수출 확대를 위해 공격적으로 설비를 확장하는 와중, 탈석유를 외치는 중동 국가들까지 석유화학 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당초 석유화학 제품은 지난 2021년 코로나 특수 아래 반도체를 제치고 우리 수출 1위를 차지한 바 있는 데다 작년 기준으로도 반도체·자동차·석유제품에 이어 넷째로 비중이 큰 수출 품목이었다. 그러나 석유화학의 침체가 가시화하면서 국내 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최근 중국의 석유화학 제품 생산 능력은 부쩍 늘었다. 실제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근 5년간 2배로 늘어 지난해엔 세계 최초로 5,000만t을 돌파했다. 현재 설비 가동률이 80%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내수 시장에서 제품이 남아돌아 동남아 등에 수출까지 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 제품이 중국 시장 내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음은 자명하다. 여기에 중동 국가들도 ‘석유에서 화학으로(oil to chemical)’ 슬로건을 내걸며 석유화학 산업 강화에 나섰다.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경유·등유와 함께 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가 나오는데, 이 나프타를 팔지 않고 직접 크래킹(분해)해 싼값에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탈탄소 흐름으로 석유사업이 사양화되자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 수직계열화 전략을 펼치는 것으로 풀이된다.
가장 공격적인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석유사 아람코다. 지난 2017년 중동 최대 석유화학회사 사빅(SABIC)을 80조원에 인수한 아람코는 이듬해 ‘화학산업’에 향후 10년간 1,000억 달러(약 132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현재까지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50조원 이상의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아람코와 중국의 밀월 관계가 강화되고 있단 점도 우리나라엔 위협이다. 아람코는 2022년 12월 중국 최대 석유기업 시노펙과 13조원을 투자하는 ‘푸젠성 구레이 2기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약 40조원에 달하는 석유화학 투자를 진행 중인데, 원유를 직접 조달하는 중동 정유사들은 원가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날 수밖에 없다. 중국 자체도 우리보다 원가 경쟁력이 높은 상황인데 여기서 중동 정유사의 협력까지 더해지면 석유화학 치킨게임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란 게 시장의 대체적인 평가다.
가중되는 손실에, 국내 기업들도 '손절' 타이밍
이 같은 배경 아래, 결국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제각기 손실을 내기 시작했다. 업계 1·2위를 다투던 LG화학과 롯데케미칼마저 석유화학 산업에서 손해를 보면서 사업에 손을 떼는 기업들도 속속 나타났다. 롯데케미칼은 이미 말레이시아에 있는 대규모 생산기지인 롯데케미칼타이탄(LC타이탄) 매각 작업에 돌입했고, LG화학 또한 전남 여수 나프타분해시설(NCC) 2공장 지분을 팔기 위해 쿠웨이트석유공사(KPC)와의 협상에 나섰다.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에 내몰린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몰락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에 시장 일각에선 차별적인 경쟁력 확보 등 사업구조 다각화를 통해 석유화학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가야 한단 목소리가 나온다. 원료 및 수출시장 다변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사업 포트폴리오를 범용제품 중심에서 고부가·친환경 제품으로 전환하고 원천기술을 개발해 타 기업과의 차별화를 이뤄내야 한단 것이다. 다만 업계에선 현 석유화학 산업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획일적인 사업 수단보단 기술력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중국 기업이 우리 기업에 기술적으로 꿀릴 게 전혀 없어진 상황에서 사업 다각화를 모색해봤자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을 지닌 중국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더군다나 앞으로는 저가원료 및 저가 운송비를 앞세운 중동 업체와의 경쟁이 더욱 심화할 전망이다. 당장 석유화학 산업으로 국내 기업이 살길을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의 끈이 사실상 없어진 셈이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원천기술 개발에 집중한다면 석유화학 산업이 다시금 살아날 수 있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기술적으론 후진국 대우를 받는 한국이 단기간 타 국가를 훌쩍 넘을 만한 기술 역량을 갖출 수 있을지엔 의문이 적지 않다. 한국이 가장 강점을 지녔다 평가되는 IT 계열에서마저 양자기술 등 최신 기술 역량은 통신 분야를 제외하곤 미국, 중국, EU 등에 비해 최대 10년가량 뒤처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화학 계열 R&D만 무작정 늘린다고 산업 부흥이 제때 이뤄질 수 있을까. 롯데케미칼의 LC타이탄, LG화학의 NCC 2공장을 제값 주고 팔기도 어려운 게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현실임을 똑바로 직시할 필요도 있다는 의견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