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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 천문학적 규모 자금 내세워 전 세계 VC 업계서 영향력 키워
최근 들어 해외 프로젝트 투자 줄이고 자국으로 눈 돌리는 분위기
‘중동발 돈맥경화’ 우려 속 지정학적 흐름 읽는 전략적 대응 태세 갖춰야
더 이코노미(The Economy) 및 산하 전문지들의 [Deep] 섹션은 해외 유수의 금융/기술/정책 전문지들에서 전하는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았습니다. 본사인 글로벌AI협회(GIAI)에서 번역본에 대해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세계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 VC) 생태계의 중동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엔 사우다아라비아의 초대형 국부펀드가 자리 잡고 있다. 일각에선 이 국부펀드가 갑자기 돈줄을 옥죌 경우 벌어질 대규모 ‘돈맥경화’ 사태를 우려한다.
사우디의 공공투자펀드(Public Investment Fund, PIF)는 9,250억 달러(약 1,240조원) 규모를 자랑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Crown Prince Mohammed bin Salman)가 이끄는 PIF는 지난 10년간 전 세계 VC 업계에 자금을 대 왔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를 비롯한 중동 여러 지역의 투자자들이 석유 생산량이 줄고 유가가 떨어지면서 전통적인 부의 공급원이 맥을 못 추게 되자 VC 업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자국 내 프로젝트를 더욱 우선시하는 모습이다.
글로벌 VC 업계 자금줄로 부상한 PIF
PIF는 대규모 펀드 약정 또는 직접 투자를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다. 지난 2016년 일본 소프트뱅크(SoftBank)의 비전 펀드(Vision Fund)에 최대 450억 달러(약 60조2,700억원)를 투자하기로 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가 하면 우버(Uber)를 비롯해 미국 증강현실 기업 매직리프(Magic Leap) 등에도 투자했다. 이 밖에도 여러 투자 프로젝트가 PIF VC 부문 자회사인 사나빌(Sanabil)을 통해 실현됐다. 이렇듯 VC 업계 내 PIF의 단단한 입지를 고려하면, 이 펀드가 글로벌 돈줄을 움켜쥐는 건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다른 산유국들이 사우디의 전철을 밟을 경우 그 파장은 더 크다.
실제 사우디뿐 아니라 중동 투자자들 사이에선 지난 10년 새 자국 밖의 VC 거래 참여도가 부쩍 올랐다. 수입 내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를 다각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글로벌 투자 전문 연구기관 피치북(PitchBook)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중동 지역 밖 투자 라운드의 4.6%에 중동 투자자의 이름이 올랐다. 10년 전인 2014년보다 2.9% 상승한 수치다. 이들 프로젝트들의 거래 가치에서 중동 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2.6%로 지난 10년 새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더불어 펀드 약정 분야에서도 중동 투자자들의 무게감은 두드러진다. 아부다비 투자청(Abu Dhabi Investment Authority)과 그 연계 펀드인 무바달라(Mubadala) 등 국부펀드들은 VC 업계의 주요 돈줄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해 왔다.
이처럼 중동과 해외 VC들의 결합이 부쩍 증가한 건 그간 다소 어두웠던 업계 생태계 영향이 크다. 지난 2022년 서구권에서 기관 투자자 발 자본이 대폭 줄어든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여기저기서 공모주 수익률이 바닥을 쳤는데, 사모 자산 비중이 컸던 출자자(LP)들이 부쩍 몸을 사리면서 VC 업계 돈줄이 말라붙자 중동발 자금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VC 펀드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조달한 자본금은 지난 201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자금난이 이어지자 앤드리슨 호르위츠(Andreessen Horowitz)와 파운더스 펀드(Founders Fund) 등 유명 VC를 비롯한 투자자들은 더 안정적인 돈줄을 찾아 중동으로 향했다.
중동 자금 빠져나갈 시 전 세계 VC 업계 타격 불가피
중동으로 눈길을 돌린 건 비단 서구의 VC들만이 아니었다. 중국 투자자들 역시 미국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부쩍 중동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기술 투자를 막아서면서 여러 미국 LP들이 중국 관련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고, 이에 아시아권 투자자들은 다른 투자처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이 같은 지정학적 관계가 계속 불안정하게 이어지는 데다 VC 자금 흐름이 회복되지 않는 한 중동에서 내려주는 동앗줄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 자본이 빠져나갈 경우 안 그래도 심각했던 VC 업계의 자금난엔 더 큰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체 자본을 확보하려는 경쟁엔 한층 더 불이 붙을 것이고, LP들의 관심은 기존 기업들로 쏠릴 가능성이 높은 만큼 작은 규모 VC들이 확보할 수 있는 자본은 더 줄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서구권과 아시아의 패밀리 오피스 및 자산가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VC로 향하고 있다. 중동 LP들의 비중이 줄어들더라도 어느 정도 VC 업계가 버틸 수 있는 이유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돈줄이 PIF 같은 ‘큰손’들이 빠진 자리를 충분히 메울 수 있느냐는 것인데, 쉽진 않을 가능성이 높은 데다 스타트업들 역시 같은 종류의 어려움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스타트업들의 자금 조달 환경 역시 열악한데, 어지간한 후기 단계 벤처 기업들만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국부펀드들이 그간 후기 단계 또는 프리 IPO(Pre-IPO, 상장 전 지분 투자) 단계 기업들에 중요한 돈줄 역할을 해 온 것을 감안하면, 이들 기업의 갑작스런 자금난으로 엑시트(투자금회수) 계획을 제때 실행하지 못할 경우 투자자들에겐 추가적인 영향이 갈 수 있다.
이에 일각에선 경기 침체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경우 중동 자본에 접근하기 위해 현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 PIF 관계자는 최근 들어 각국 펀드매니저들에게 사우디에 투자하는 대가로 기존보다 더 많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국가의 국부 펀드들도 현지 지역에 대한 지원을 강조하고 있다.
카타르 투자청은 올해 첫 재간접펀드를 출시하고 국제 및 지역 VC 펀드에 10억 달러(약 1조3,300억원)를 투자했다. 이 펀드의 주된 목표는 VC 펀드들을 카타르, 더 나아가 걸프 지역으로 끌어들여 현지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걸프 지역 스타트업들은 서구 스타트업들과 마찬가지로 난관을 겪고 있다. 지난 2022년 정점을 찍었던 거래 건수와 가치가 크게 떨어진 상태다.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이 지역에서 체결된 거래는 614건으로, 총 투자액은 37억 유로(약 5조4,900억원)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VC들의 자금이 들어온다면 지역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네트워크 및 전문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끌어올려 더 많은 기회를 낚아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역 투자 경험이 없는 VC들에는 상당한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성장하는 시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PIF의 초점이 자국 국내 시장으로 향하더라도 중동의 우물이 쉽게 마르진 않겠지만 해외 VC들이 지역적 역학관계에 조금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다양한 상황에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원문의 저자는 레아 호지슨(Leah Hodgson) 피치북(PitchBook) 선임 리포터입니다. 영어 원문은 What happens if Middle Eastern VC money stops flowing? | PitchBook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