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수요 급증에 D램·낸드 가격 고공행진, 7년 만의 '반도체 슈퍼사이클'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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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램 공급량 정체, 데이터센터 AI 열풍 등 영향 수요와 공급 요소 고려할 때 구조적 성장 기대 中 반도체 기업 생산 확대와 과잉 투자는 변수

최근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7년 만의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HBM(고대역폭 메모리) 수요 급증으로 D램 공급량이 정체된 데다 AI·데이터센터·전장 등 주요 수요처가 공격적으로 구매량을 늘리면서 이번 상승세가 단순한 업황 반등을 넘어 구조적 변화와 중장기 성장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중국 반도체 기업의 생산 능력 확대와 과잉 투자는 경계해야 할 변수로 꼽힌다.
낸드플래시 가격, 9개월 연속 상승세 이어가
1일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 1Gx8)의 9월 평균 고정거래가격이 전월 대비 10.53% 오른 6.3달러로 집계됐다. 해당 제품 가격이 6달러를 넘어선 건 6년 8개월 만이다. 고정거래가격은 메모리 업체와 수요 기업 간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대량 거래 가격으로, 업황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통한다. 특히 PC용 D램은 올해 4월 22.22% 오른 이후 6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왔으며, 지난 8월에는 46.15%의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다.
메모리카드와 USB 등에 쓰이는 낸드플래시 범용 제품(128Gb 16Gx8 MLC)의 9월 평균 고정거래가격도 전월 대비 10.58% 상승했다. 낸드 가격은 9개월 연속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다. 3분기 평균 계약가격은 10%가량 오를 것으로 추산한다. 낸드 웨이퍼 가격 역시 최대 13%까지 오를 전망이다. AI, 통신, 전장 등 주요 산업군에서 공격적으로 구매량을 늘리면서 낸드 가격을 끌어올렸다. 특히 고성능 고용량 낸드 제품은 사실상 완판돼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D램 가격 상승과 함께 재고 기간도 급감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글로벌 D램 공급자의 평균 재고는 3.3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2018년 반도체 슈퍼사이클 당시 평균 재고(3~4주)와 비슷한 수준이다. 업체별로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2주, 삼성전자가 6주 수준으로 조사됐다. D램을 구매하는 구매자의 평균 재고는 10주 정도로 집계됐다. 통상 구매자 재고가 공급자보다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여전히 수요가 강하다는 분석이다.
단순한 업황 반등 아니라 중장기 흐름 가능성
이 같은 수요 급증세를 주도하는 것은 역시 AI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발간한 리포트를 통해 “매우 강한 AI 성장에 의해 메모리 공급-수요 불균형이 발생할 것”이라며 내년 메모리 초호황을 예측했다. 이 같은 견해를 내놓은 이유로 “올해 4월 반도체 업황이 저점을 찍은 후 AI 성장이 주도하는 새로운 기술 사이클이 시작됐다”며 “피크가 2027년으로 이동 중”이라고 설명했다. AI가 전통적인 메모리 산업의 사이클 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급 측면에서 확장이 쉽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AI 열풍으로 AI 학습과 운용에 쓰이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의 몸값이 높아졌고, 여기에 탑재되는 HBM 수요도 급증했다. HBM은 D램을 아파트처럼 쌓고 묶어서 만드는데 삼성전자 등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D램 생산 라인을 HBM용으로 전환했고, 결과적으로 D램 생산량은 감소했다. 트렌드포스는 주요 벤더들의 범용 D램 생산 능력이 사실상 정체될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 2017~2018년 대규모 구축됐던 데이터센터가 서버 교체 시기를 맞으면서 일반 D램 수요가 늘었다. D램과 함께 서버에 들어가는 eSSD 수요도 폭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이번 사이클이 단순한 업황 반등이 아니라 서버 교체·DDR5 전환·신규 메모리 수요 등이 동시에 겹치며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전문가들도 이번 사이클은 과거와 달리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중장기 흐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과거와 같은 슈퍼 사이클을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신중론이 제기된다. 2010년대만 해도 중국이 제대로 된 메모리 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현재는 CXMT와 YMTC가 자국 기업에 공급 물량을 늘려나가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더욱이 슈퍼 사이클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높은 프리미엄을 받고 D램을 판매했던 점을 감안하면 두 기업의 존재는 슈퍼 사이클 재현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슈퍼사이클은 경기 침체로 이어져
이번 D램 가격 반등이 '반도체 착시효과'를 일으켰던 1995년 첫 번째 슈퍼사이클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업황에 대한 섣부른 기대에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당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장악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반도체 산업은 1995년 전체 수출의 13.4%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성장했다. 반도체 업계는 이 시기를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렀고, 호황이 계속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 속에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매년 조 단위 투자를 하며 시설 증설에 나섰다.
이번 D램 가격 반등이 ‘반도체 착시효과’를 불러왔던 1995년 첫 번째 슈퍼사이클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반도체 업황을 둘러싼 과도한 낙관론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당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고, 반도체는 전체 수출의 13.4%를 차지하는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부상했다. 업계는 이 시기를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렀고, 호황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국내 기업들은 매년 조 단위 설비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낙관적 전망은 곧 과잉 투자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1995년 말 정점을 찍은 D램 가격은 곧 급락세로 전환됐다. 1996년과 1997년 D램 가격이 각각 51%, 65% 폭락하면서 삼성·LG·현대전자 등 이른바 ‘빅3’ 기업들은 무리한 사업 확장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반도체 가격 하락은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 제조업 전반에 직격탄이 됐고, 고용 위축과 경쟁력 약화를 불러왔다. 충격은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으로 번졌고, 아시아 외환위기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심각한 침체 국면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반도체 호황은 한국 경제에 혹독한 시련을 안겼다. 1997년 IMF 외환위기 국면에서 정부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적자 누적이 심했던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합병을 추진했다. 1998년 두 회사는 합병됐고 훗날 하이닉스 반도체로 재편됐다. 삼성전자조차 위기를 피해 가기는 어려웠다. 당시 비즈니스위크는 “삼성전자가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며 45억 달러 규모 채무 보증을 떠안았다”며 "컴퓨터, 백화점, 휴대폰, 자동차 등 상당수 계열사가 손익분기점조차 넘기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