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내년 R&D 예산 삭감, 중소기업 3천여 개에 사업비 2~3개월치만 지급 예정 일부 관계자들, 벌써부터 직원 내보내며 내년 '춘궁기' 준비 정책 오류보다 집행 오류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이 큰 폭으로 삭감될 것이 사실상 결정된 가운데, 3,000개가 넘는 중소·벤처기업이 내년도 R&D 사업비를 온전히 받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다.
26일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2024년도 중소벤처기업부 예산안 평가 결과, 총 3,000여 개에 달하는 계속과제가 내년 예산을 편성받기 어려울 것으로 나타났다. 다년도에 걸쳐 사업이 진행되는 계속과제 특성상 총 12개월분 예산이 편성돼야 하지만, 대부분의 과제가 2~3개월치 예산만 편성된 상태다. 이에 일각에서는 사업 자체를 중단하고 의무 고용했던 청년인력 상당수를 대량해고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R&D 예산 삭감, 중소·벤처 다년 프로젝트 정리 압박으로
업계 전문가들은 지난 8월 각종 R&D 예산 삭감 및 효율적 집행 보도가 나올 때부터 내년도 정부 과제를 진행하는 기업들이 예산 운용에 치명타를 맞을 것으로 예상했다. 삭감액 대부분이 계속과제 예산에서 빠져나간 것이 알려지자 중소기업 및 벤처기업 중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는 기관들의 내년 인력 관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조심스러운 우려가 이미 시장에 널리 퍼진 상태다.
실제로 중소기업상용화 기술개발 R&D 사업의 경우, 내년 예산이 올해 대비 무려 64%가 감소했고, 총 648개 과제가 2~3개월분 사업비만 배정받은 상태다. 각 기업별로 타개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내년 2월에서 3월 사이에 최소 600개 이상의 정부 과제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종료되는 것이다. 그나마 편성된 예산도 회계연도 일치를 위한 사업 정리 목적으로 내년 3월 이후부터는 사실상 정부 출연금 없이 단독으로 R&D를 지속해야 한다.
내년 사업이 종료되는 과제를 포함하면 피해 기업 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사업 종료가 임박한 상반기 종료 과제는 온전히 예산이 편성됐지만, 하반기 종료 과제는 계속과제들과 마찬가지로 2~3개월 예산만 편성됐다.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2025년까지 사업 계획이 편성된 과제를 진행하고 있는 한 관계자 A씨는 "사실상 연구 사업을 하지 말거나, 회삿돈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라며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중소·벤처 기업들은 사실상 연구 개발 사업에 손을 놓은 상황"이라고 답했다.
중소기업 R&D 과제 대부분 예산 대폭 삭감, 자생력 높은 R&D 사업만 살아남을 수 있어
예산 삭감은 특정 분야 R&D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구조혁신지원 R&D, 중소기업기술혁신개발 R&D 등의 대부분의 중소기업 R&D 과제에 대한 예산이 동시에 대폭으로 삭감됐다. 반면 신규과제 예산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다.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같은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새로 시작하는 과제는 계속과제, 내년 종료 과제보다 많은 예산을 편성 받았다. 사실상 같은 과제가 내년에도 이어지는 상황이지만 명칭이 변경되거나 관할이 변경되는 등의 경우에는 예산이 삭감되지 않은 것이다. 중소기업계가 이번 예산 삭감을 주먹구구식이라며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예산 삭감으로 내년 사업 운영에 고민이 많아졌다는 A씨는 30% 이상의 연구 개발 인력을 내보내는 것으로 확정하고 개발팀 운영 방침을 변경 중이라고 밝혔다. 과거에는 정부 프로젝트 수주 후 관련 업무를 하는 부서와 아닌 부서로 이원화된 개발팀을 운영했으나, 예산이 삭감되는 만큼 정부 프로젝트 담당 인력들은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국가 R&D 참여기업은 출연금 5억원당 1명의 청년 인력을 의무 고용해야 하지만 정부 출연금을 받지 못하게 됐으니 기업 입장에서도 고용 의무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A씨는 주변 업체들은 이미 지난 9월부터 개발 인력을 내보내고 있어 정부 프로젝트 위주로 업무 포트폴리오를 갖춘 인력들의 재취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예산 효율 배분은 동의하지만
A씨는 벤처 업계 전반적으로 예산을 효율 배분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는 큰 틀에서 동의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합리적인 기준 없이 담당 공무원들이 임의로 예산 배정 기준을 정하면서 이른바 '정부 프로젝트 헌터(Hunter, 정부 프로젝트 위주로 사업체를 꾸리는 기업들)'들은 사정을 알고 기민하게 대응해 예산을 다시 배정받는 반면, 정작 제대로 프로젝트 운영을 하는 일부 기업들은 이번 정책 변경의 직격탄을 맞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토로했다.
정부 프로젝트와 선을 긋고 사업을 운영 중이라는 B씨는 "정부 프로젝트를 안 한다고 하면 어리석다는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쉬운 돈'을 마련하질 못하다 보니 사업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렇게 정책에 휩쓸리는 상황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어 B씨는 그간 정부 프로젝트들 탓에 개발 인력들의 몸값이 지나치게 올라갔던 문제가 이번 기회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면서도 "역량에 따라 선별된 예산 배정이 돼야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그간 일선 공무원들이 정책 방향을 따라가는 흉내만 내고 실질적으로 업체 간 역량 구분 능력이 없는 만큼, 연말·연초를 거치며 대규모 혼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을 내놨다.
김경만 의원은 “윤석열 정부가 R&D예산을 대책 없이 대폭 삭감하고도 중소기업 R&D 예산은 일부 필요한 건만 선별하겠다고 선을 긋는데, 기준이 있었으면 애초에 적용했어야 한다”면서 “정부 예산 수립이 정권 기조에 맥없이 휘둘리고 주먹구구식이라는 걸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번 예산 배정과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관계자는 "예산 배정 방식에 대해서 상위 기관에서 내려온 '가이드라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내부적으로도 말이 있지만, 공무원 조직의 특성상 유야무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