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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특사 파견, 러시아와의 종전 협상 착수 美 방위비 압박에 유럽 내에서도 자강론 부상 NATO 내 유럽 회원국들, 방위비 확대 등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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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미·러 직접 대화를 통한 종전 협상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일방적인 침공에 면죄부를 주고, 전후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흔들 것이란 우려가 크다. 최근에는 미국이 종전 협상 과정에서 유럽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유럽 정상들이 긴급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유럽이 협상 테이블에서 사실상 배제될 처지에 놓인 데 대해 대응책을 논의하고 목소리를 낼 전망이다.
17일 유럽 정상들, 프랑스에 모여 긴급회의 개최
16일(이하 현지시각) CNN,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7일 파리에 유럽 정상을 초청해 비공식 긴급 정상회의를 열기로 했다. 이번 회의에는 독일·영국·이탈리아·폴란드·스페인·네덜란드·덴마크 정상들과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각국 정상들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기점으로 유럽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이 급변한 상황과 이에 따른 유럽의 안보 위험 등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날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주요국들은 키스 켈로그 미국 대통령 우크라이나 특사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유럽 국가들은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앞서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각각 통화한 뒤 미국 고위 관료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러시아와 직접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CNN에 따르면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과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가 종전 협상에 참여할 예정이다.
트럼프, 우크라 안보 보장에 유럽의 역할론 강조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패싱'은 미국 우선주의 안보 정책의 연장선으로, NATO 내 유럽 국가의 방위비 증액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방위비를 적게 쓰면서 자국의 경제와 복지에 투자하는 것을 가리켜 "미국에 대한 세기의 도둑질"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현재 NATO 소속 유럽 국가들의 방위비 목표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 각국의 방위비 지출이 크게 늘었음에도 2024년 기준 32개 회원국 중 9개국이 '2%룰'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NATO 회원국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미군의 부담이 늘어났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주 유럽 동맹국에 외교 문서를 보내 종전 협상이 이뤄질 경우 유럽이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당 문서에는 우크라이나 파병 여부, 유럽 주도 평화유지군의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 질문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에 관해 유럽의 책임을 강조해 온 만큼 이번 문서를 토대로 유럽에 '안보 청구서'를 내밀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실제로 켈로그 특사는 최근 뮌헨 안보회의에서 유럽을 향해 "협상 테이블 배석 여부를 불평할 게 아니라, 구체적 제안과 아이디어를 마련하고 방위비를 증액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미국과 러시아 당국자들이 오는 18일 고위급 회담 등 본격적인 실무 협상까지 예고하자, 유럽 주요국들은 방위비 규모 확대 등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유럽이 방위비 지출을 늘리는 등 새로운 군사 강화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달 23일 독일 총선이 끝나면 발표될 것"이라고 전했다.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부 장관은 뮌헨 안보회의 참석 중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과거에 본 적 없는 대규모 방위 패키지를 출시할 것"이라며 "유럽 안보를 위해 유로존 재정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와 유사한 수준의 재정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평화유지군을 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핀란드나 크로아티아 등 일부 국가 정상들은 EU가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목소리를 내려면 특사를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켈로그 특사처럼 유럽 차원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협상 과정에 참여할 창구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이번 긴급 정상회의에서 도출된 유럽의 메시지는 스타머 총리가 이달 내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할 때 전달할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는 "유럽 당국자들은 미·러의 종전 협상이 가시화함에 따라 당혹감 속에서도 종전 협상과 관련한 트럼프 행정부의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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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평화적 위기 해결 강조하며 중재자 역할 자처
미국의 유럽 패싱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국은 독일을 비롯한 EU와의 관계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15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은 뮌헨 안보회의 참석을 계기로 독일을 방문해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 지도자들과 연쇄 회담을 갖고 자유무역, 다자주의, 우크라이나 전쟁 등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숄츠 총리와의 회담에서 왕이 부장은 독일을 전략적 파트너로 간주하며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정신에 입각한 전방위적 협력을 강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특히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양국 간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일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같은 날 진행된 뮌헨 안보회의 연설에서 왕이 부장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적 위기 해결을 원한다"며 공통의 목표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 정부가 유럽 당사국과의 소통을 유지하며 평화 회담을 촉진하는 데 건설적인 역할을 할 의향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뤼터 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는 NATO의 유럽 회원국들을 향한 미국의 방위비 증액 압력이 높아지는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균형 잡히고 효과적이며 지속 가능한' 유럽 안보 프레임워크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력 강화가 아닌, 유럽 국가들이 주도적으로 안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개입 움직임 속에 미국은 유럽 다독이기에 나섰다. 왈츠 국가안보보좌관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국가들이 종전 협상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에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히 종전과 관련한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고 스타머 총리와도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종전 협상 이후 유럽의 안보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군사 안보 측면에서 유럽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며 "미국이 러시아와의 협상을 먼저 시작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모두를 한자리에 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