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클도 외면한 원화, 달러만 살아남은 스테이블코인 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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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발행 시 관리 부담 위험
수요 부재에 활용성 극히 제한
일부 통화 블록 틈새 전략 모색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USDC의 발행사 서클이 국내 금융권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협력을 거부하고 달러 중심 제안을 내놓으면서 시장의 이목이 쏠린다. 은행과 핀테크, 플랫폼이 앞다퉈 공급을 준비하지만 실제 사용 수요는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전문가들은 충분한 신뢰가 확보되지 않으면 스테이블코인 역시 ‘테마 상품’으로 사라질 위험을 지적한다. 한편 글로벌 무대에서는 미국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가속하고, 중국은 위안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추진하며 통화 패권 구도를 좁혀가는 모습이다.
시장에선 “예견된 흐름” 평가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히스 타버트 서클 사장은 이달 22일 한국을 방문해 4대 금융(KB·신한·하나·우리) 주요 임원들과 면담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타버트 사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해 이들 금융사와 협력할 계획이 없다는 뜻을 알리고, 대신 자사가 발행하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관련한 파트너십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서 역외 발행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가 전개될 조짐을 보이는 만큼 서클이 국내 은행권 파트너십을 선점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시장의 반응은 예견된 흐름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글로벌 결제·거래 유동성이 몰린 달러 스테이블코인과 달리 원화 코인은 국제적 사용처가 제한적인 만큼 초기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그 경쟁력에 대해선 의문이 많다”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수요가 폭증하는 달러 생태계에 연동하면 결제·송금·거래 파이프라인을 즉시 활용할 수 있지만, 원화는 그만한 글로벌 수요 기반이 부재하다는 게 금융권 전반의 시각이다.
이 같은 환경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할 경우, 관리 비용과 거시 리스크가 이익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국내 정치권에선 자기자본 5억원~10억원 수준의 문턱으로 비은행 발행까지 허용하는 방안이 논의되지만, 자본 유출과 자금세탁, 코인런 등 각종 부작용에 대비한 규율·감독 체계가 먼저라는 반론이 거세다. 한국은행은 대형 은행부터 제한적으로 발행해 효용성을 확인한 뒤 범위를 넓히는 단계적 접근을 주장하고 있으며,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코인의 광범위한 사용이 통화주권·자본통제의 실효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실수요 기반과 거시안정 프레임이 정교하게 설계되지 않는 한 비용 대비 효용이 낮다는 회의론이 주를 이룬다. 무역결제를 비롯한 일부 니즈가 존재하더라도 규제 공백과 감독 비용을 감당할 만큼의 규모와 탄력성이 입증돼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앞선 서클의 ‘달러 중심’ 제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현재 국내 금융권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협력 무게추는 원화가 아닌 달러 쪽으로 기운 상태다.
공급은 ‘들썩’ 수요는 ‘잠잠’
그럼에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논의는 공급자 중심으로 점점 뜨거워지는 양상이다. 다수의 은행과 핀테크, 플랫폼 기업이 발행 가능성을 검토하며 시장에 뛰어들 태세지만, 실사용자 기반은 여전히 빈약하다. 이미 카드 결제와 간편결제가 일상화된 한국에서 굳이 블록체인 기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할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공급자들이 ‘차세대 금융 인프라’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제도화 기대감과 정치적 논의가 맞물려 일종의 기회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카카오페이의 사례는 이 같은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전형이다. 카카오는 지난 6월 PKRW, KRKW, KRWP, KPKRW, KRWKP, KRWK 등 6종 명칭으로 총 18건의 상표를 선제 출원했다. 그러나 실사용 기반 확보는 여전히 요원한 실정이다. 카카오는 약 5,919억원의 선불충전금을 확보한 만큼 결제 실험을 시도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입장이지만, 이를 받아줄 가맹점이나 PG사, 카드사의 참여는 전무한 상황이다. 여기에 제도적으로도 VASP 라이선스 인허가 절차가 진행되지 않아 발행 단계로 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또한 카카오는 과거 블록체인 사업에서도 실패를 경험했다. 모바일 지갑 서비스 클립(Klip)과 NFT 마켓 Klip Drops는 초기 이목을 끄는 덴 성공했으나, 시장 수요 부족으로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러한 전례는 앞선 기술과 브랜드만으로는 안정적인 수요 창출이 어렵다는 점을 방증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역시 마찬가지다. 실질적 수요 기반과 준비금 관리, 금융사와 사용자 간 신뢰 구축이 선행되지 않으면 또 하나의 ‘테마 상품’으로 소멸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달러 패권 흔들거나, 강화하거나
최소한 지역 기축통화를 보유했거나,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들만이 스테이블코인 전략을 본격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 국가에선 수요 공백이 선행 과제로 지목되지만, 글로벌 차원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추진하려면 또 다른 조건들이 필요한 탓이다. 광범위한 무역과 송금 네트워크에서 통화 수요를 만들어낼 결제 생태계, 발행·유통을 지탱할 대규모 안전자산과 준비금 운용능력, 외환·자본흐름을 관리할 규제 인프라가 그 최소 요건이다.
세계 스테이블코인 거래의 99%가량이 달러인 현재 상황은 모든 시장 지배력과 규제 프레임이 미국 중심으로 형성돼 있음을 방증한다. 이 같은 구도에서 신흥국이 단독으로 균열을 내기란 쉽지 않다. 통화 신뢰는 물론 결제 네트워크, 규제 역량을 동시에 갖춘 극소수의 국가만이 스테이블코인을 전략적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 로드맵 안에 스테이블코인을 끌어들이려 한다.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중국 국무원은 이달 말 미국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대응하는 방안을 포함한 전략을 심의·승인할 계획이며, 최고 지도부 학습회에서도 위안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허용 방향을 제시한다는 방침이다. 2021년 가상자산 거래와 채굴을 전면 금지했던 보수적 태도를 떠올려 보면, 매우 선명한 정책 전환 신호다. 이는 곧 디지털 자산 영역에서라도 위안화의 사용 저변을 넓히지 못하면 국제화 전략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 같은 중국의 전략은 미국이 발 빠르게 제도화를 추진하는 것과 맞물려 현실화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자격·준비금 요건·소비자 보호를 규정한 ‘지니어스법(GENIUS Act)’에 서명하며 제도권 편입을 공식화했고, 발행사들 역시 24시간 저비용 결제 인프라를 디지털 자산·토큰화 금융 전반에 확장하며 결제 패권을 덧칠하는 중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새로운 통화가 단기간 내 대체재로 부상하기 어렵고, 각국 전략은 ‘달러에 대한 보완 혹은 블록 내 대안’으로 수렴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