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중독 후폭풍" 빚에 허덕이는 프랑스, 신용등급 강등에 국채-회사채 금리 역전까지
입력
수정
프랑스 국채 금리, 자국·유로존 기업 회사채 금리 웃돈다 과도한 복지 지출에 불어난 부채, 긴축 시도한 총리들은 줄줄이 '불신임' 피치, S&P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 시선 '싸늘'

프랑스 국채 금리가 프랑스 민간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금리를 웃돌기 시작했다. 과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해 프랑스 정부의 재정 위기가 가시화하자, 투자자들 사이에서 프랑스 국채보다 프랑스 회사채가 더 안전한 투자처라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시장 상황이 눈에 띄게 악화했음에도 불구, 프랑스 정부는 의회 등의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재정 축소 방안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먹구름 낀 프랑스 경제
13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골드만삭스 자료를 인용, 최근 로레알, 에어버스, 악사 등 10개 프랑스 기업이 발행한 채권 금리가 비슷한 만기의 프랑스 국채를 밑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2006년 이후 최대 규모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80개 이상 기업의 회사채 금리가 프랑스 국채보다 낮은 수준에서 거래되는 중이다. 유로존 내에서도 특히 부유한 경제국으로 꼽히던 프랑스에서 이례적인 국채-회사채 금리 역전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 채권 금리가 급등한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재정 위기가 꼽힌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프랑스 국가부채는 지난해 기준 3조3,000억 유로(약 5,351조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13%에 육박한다. 이는 유로존 내에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자, 6,800만 명의 국민이 1년간 번 돈을 모두 부채 상환에 투입해도 갚지 못하는 금액이다. GDP 대비 재정 적자 역시 EU 평균치(3%)의 약 두 배 수준인 5.8%까지 뛰어올랐다.
이처럼 재정 상황이 악화한 배경에는 각종 복지 지출 확대가 있다. 프랑스는 공공 지출 규모가 2023년 기준 GDP의 57%를 차지하는 국가다. OECD 평균 공공 지출 규모가 42.6%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 연금과 건강보험, 실업수당 등 OECD 분류상 ‘사회 보호 부문’ 지출 비중은 23.4%로, 핀란드(25.7%)와 스웨덴(25.0%) 다음으로 많다. 이 같은 대규모 재정 지출은 구조적 적자를 낳았고, 이후 이자 비용이 확대되며 부채 비율 상승 흐름이 고착화했다.

긴축 정책 내놔도 '무용지물'
프랑스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하자, EU는 지난해 7월 프랑스에 과도 적자 절차(EDP) 개시를 권고했다. EDP는 EU 회원국의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감시·시정하는 제도다. 아울러 올해 1월에는 프랑스 정부에 “2029년까지 재정 적자를 GDP의 3%로 줄이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이에 작년 말 미셸 바르니에 내각이 긴축 예산안을 마련했으나, 여소야대 프랑스 의회는 ‘긴축 반대’를 정치적 무기로 삼으면서 재정 개혁을 위한 예산안 통과에 강하게 반대했다. 바르니에 당시 총리는 긴축안 강행 처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끝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났다.
바르니에 내각의 뒤를 이은 프랑수아 바이루 내각 역시 긴축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7월 공휴일 2일 축소 △연금 동결 △의료 예산 감축 등을 통해 총 440억 유로(약 64조원)의 지출을 줄인 내년도 예산안을 내놓은 것이다. 야권은 “부자와 대기업 증세 없이 서민만 희생시키는 방안(좌파)”, “전기 요금 인상과 의료비 부담 확대로 인해 서민과 고령층의 생활고가 심해진다(극우)” 등 비판 의견을 쏟아내며 재차 반기를 들었다. 이에 지난 8일 프랑스 의회에서는 바르니에 당시 총리의 긴축 예산안을 둘러싼 신임 투표가 벌어졌고, 투표에서 패배한 바르니에 당시 총리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프랑스의 정국 혼란이 ‘재정 중독’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시장 전문가는 "한 번 늘어난 재정 지출을 줄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며 "민간이 혁신을 통해 경제 성장을 주도하지 않고, 정부 자금에만 의존하려 들면 국가 재정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어 "프랑스가 처한 상황은 중국은 물론 한국 등 '경제 포퓰리즘' 정책을 택하는 나라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덧붙였다.
신용 등급까지 위태로워
글로벌 신용평가기관들은 현재 프랑스가 처한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12일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하향했다. 지난해 말 프랑스 정부가 2025년 예산안을 발표했을 당시 부정적 전망을 제시한 후 1년도 되지 않아 강등 결정을 내린 것이다. A+등급은 영국과 한국보다 한 단계 낮고, 벨기에와 같은 수준이다.
피치는 보고서를 통해 “프랑스 정부가 신임 투표에서 패배한 것은 국내 정치의 분열과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방증”이라며 “이러한 불안정성은 재정 건전성을 달성하는 정치 시스템 역량을 약화한다”고 강등 이유를 설명했다. 아울러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2026~2027년 GDP의 5% 이상으로 유지될 것이며, 국가부채도 2027년 121%까지 늘어나리라고 예측했다.
신용평가사 S&P 역시 프랑스 정부가 재정 적자를 줄이지 못하면 오는 11월 평가에서 등급을 하향 조정할 수 있다고 경고한 상태다. 지난해 초 프랑스 신용등급을 ‘AA-’로 낮춘 뒤에도 부정적 시각을 거둬들이지 않은 셈이다. 시장에선 S&P마저 신용등급을 끌어내릴 경우, 프랑스가 차입 비용 상승으로 인해 재정 악화가 심화하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