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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기 삭감된 R&D 예산, 이번엔 '무차별 예산 증액'? '이재명식 예산'에 치중한 野, 예산 정쟁 노선 확대 정치 투쟁으로 변모한 R&D 예산 편성, 미래 경쟁력는 '뒷전'
무더기 삭감된 내년 중소기업 R&D 계속과제 예산 원상 복구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정밀한 판단 없이 증액이 이뤄진 탓이다. 계속과제를 수행 중인 중소기업 3,000여 개 중 상당수가 내년 정부 출연금을 받지 못해 사업 중단을 피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과학기술계의 절규가 쏟아진다. 야당이 '이재명표 예산'에 치중된 증액을 남발해 오히려 예산 선별이 더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R&D 예산 증액 나선 野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위원회(산중위)가 지난 20일 의결한 중소벤처기업부 소관 2024년도 예산안에서 계속과제 지속을 위해 증액된 중소기업 R&D 예산은 일반회계 기준 약 1,381억원으로 파악됐다. 당초 협약된 계속과제 수행을 위해 필요한 예산 부족액 3,164억원의 절반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나마 소재부품장비경쟁력특별회계에서 1,000억원 상당의 증액안이 올라갔지만, 계속과제와 무관한 분야 예산만 채워졌다. 오히려 일부 계속과제는 예산이 추가 삭감되기도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소기업기술혁신개발, 중소기업상용화 기술개발 등 사업에서 원전 분야 R&D 지원분 129개 과제, 약 200억원이 감액됐다. 야당이 예산안을 전권으로 의결하면서 원전 분야 R&D 사업은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다고 부대의견을 단 데 따른 결과다.
야당이 의결한 중기부 예산 증액 규모는 3조4,135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계속과제 R&D 증액 내역은 소재부품장비특별회계, 지역균형발전특별회계 등을 모두 포함해도 2,000억원을 겨우 웃돈다. 야당이 증액한 예산 상당수는 이른바 '이재명표 예산'에 해당하는 내역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약 1조8,650억원이 순증액된 '소상공인 에너지지원금'이 대표 사례다. 그나마 증액된 R&D 예산도 계속과제 지속을 위한 내역이 아니었다. '(전남)친환경 HDPE 소형어선', '(전북)고압 탄소복합 탈부착 수소시스템 실증'과 같은 지역 민원성 R&D 사업이나 지난 정권 역점 사업인 소재부품장비경쟁력강화 특별회계 분야 R&D에 예산이 집중된 모양새다.
야당 주도로 이뤄진 증액이 사실상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면서, 과학기술계에선 "야당의 손에 의해 가장 시급한 분야에 대한 지원이 더 어려워졌다"는 볼멘소리가 쏟아진다. 이에 대해 한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결국 증액 심사는 예산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를 설득해야 하는데 이렇게 무더기로 증액 요구가 이뤄져서는 정말 중요한 분야에 대한 선별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내년 중소기업 R&D 사업 계속과제 수는 3,023개, 예산 부족액은 3,164억원이다. 야당이 증액을 요구한 예산의 10분의 1이면 정부 R&D 사업 연속성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증액 심사가 주먹구구로 이뤄지면서 그나마 살릴 수 있는 예산조차 날아가게 될 형국이 됐다.
야당도 '주먹구구', R&D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자세는
R&D 예산 편성이 졸속의 연속을 겪으면서 과학기술계의 피해가 날로 커지고 있다. 당초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했던 건 R&D 카르텔 해소 및 이에 따른 '선택과 집중' 강화였다. 이를 위해 정부여당은 계속과제 예산을 3,000억원가량 깎았으나, 야당이 이에 반발하며 묻지마 증액을 남발했다. 특히 야당이 상임위 단독 의결로 전 정권에서 키우던 사업은 복원하고 현 정부 주력 사업은 다시 삭감하면서 정쟁의 불씨가 더 커졌다. 사실상 정부여당과 야당의 힘겨루기에 과학기술계가 희생된 셈이다. 무풍지대에 놓여 있던 R&D 예산이 정쟁의 한가운데 서면서 면역이 없던 과학기술계의 상처가 더욱 곪아가는 모양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야가 장기적으로 다뤄야 할 예산을 당장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서만 활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R&D 예산 논의가 국가 경쟁력 차원보다 젊은 연구원들 표심 경쟁으로 흐르면서 본질이 왜곡됐단 것이다. 박노욱 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원은 “R&D 예산 내용을 보면 사실은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지만, 대통령이 이를 카르텔 타파와 연결시키자 야당이 거꾸로 역공을 펼친 것”이라며 “여야의 예산 심의가 사업의 타당성을 두고 벌어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어젠다를 선점하기 위한 투쟁으로 흐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와 관련 없는 사업들이 갑자기 이슈를 타면서 ‘쟁점 예산’이 돼버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미래 지향적인 예산 설정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정쟁을 멈추고 국회 차원에서 미래 경쟁력 확보에 힘을 보태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