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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올해 세계 언론자유지수 또 중위권 기록
날로 추락하는 순위, "일본 언론계 고질적 폐단 탓" 주장
뒷전으로 밀려난 사회 문제 보도에 국제사회 우려도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국경없는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ères, RSF)가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언론자유지수' 조사에서 일본이 180개국 중 70위를 기록했다. 해당 지수에서 매년 중위권을 맴도는 것을 두고 일본 보수진영에선 "신뢰할 수 없는 지수"라는 반박이 나오지만, 언론에 대한 일본 당국의 압박과 통제는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민주주의 후퇴한 탓” vs “신뢰성 없는 지수”
실제로 데이비드 맥닐(David McNeill) 일본 성심여자대학 교수는 “일본에선 언론이 기득권 중심 저널리즘을 고수하고 기업과의 이해관계에 의존하는 탓에 중요한 공적 이슈에 대해선 보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RSF의 언론자유지수가 공개된 직후 일본의 베테랑 정치인이자 현직 야권 중의원인 오자와 이치로(Ozawa Ichiro)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일본은 놀라운 수준의 민주주의 후퇴를 겪고 있다”며 “이 지수를 보며 일본 국민들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우익 웹사이트인 재팬포워드(Japan Forward)는 RSF의 자료가 ‘지수’로 분류되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수집된 정보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해당 지수가 몰타를 일본과 비슷한 수준에 올려놓은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몰타는 올해 언론자유지수에서 73위에 자리했는데, 이곳에선 지난 2017년 현지 언론인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지아(Daphne Caruana Galizia)가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스’와 몰타 당국의 관련성을 지적하는 보도를 한 뒤 자동차 폭탄 공격으로 숨졌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8년 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파나마 최대 로펌이자 '역외 비밀 도매상'으로 악명 높았던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 자료를 분석한 조세 회피 관련 문건이다.
날로 추락하는 순위, “폐쇄적인 기자단 문화 영향 크다”
일본이 RSF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건 지난 2010년으로, 당시 순위는 11위였다.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결과로 평가됐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일본은 늘 20~40위를 맴돌다가 2008년엔 51위까지 추락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듬해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민주당에 패한 직후엔 언론 생태계가 다소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가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전통적으로 일본 언론계엔 일부 매체 또는 기성 언론인들에게만 취재원 및 취재처 접근 권한이 부여되는 이른바 ‘기자단 제도’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다. 고위공무원들이 참석하는 백브리핑 등에 기자단 소속 매체만 출입할 수 있게 하는 등 정보 접근 권한 자체를 차단하는 제도다. 이는 다양한 매체의 독립적인 보도를 방해하는 요소로 지적돼 왔다. 한국 기성 매체들의 폐쇄적인 출입기자 시스템 역시 이 같은 일본 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맥닐 교수는 이러한 기자단 제도가 일본의 낮은 언론자유지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그는 “민주당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처하는 방식은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며 “대부분의 주요 매체는 ‘원자로는 안전하다’는 정부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멜트다운(노심용해)’이라는 용어 사용을 두 달간 의도적으로 자제하기도 했다”고 역설했다.
이후 지난 2012년 다시 정권을 잡은 자민당은 진보 매체들을 한층 더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 아베 신조(Abe Shinzo) 당시 총리는 12명으로 구성된 일본 공영방송 NHK 이사진 중 4명을 보수 인사로 임명했고, 자민당은 방송사 사장들에게 ‘정치적 공정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2016년엔 진보 성향 앵커 3명이 거의 동시에 퇴사하는 사건으로 정치적 논쟁이 일자 정부가 해당 방송국의 폐쇄 가능성을 내비치는 일도 벌어졌다.
같은 해엔 아베 전 총리의 언론 통제가 국제사회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데이비드 케이(David Kaye) 국제연합(UN) 표현의자유특별보고관은 일본 매체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며 언론사들의 자체 검열과 날로 추락하는 독립성, 매체들 사이의 연대 부족 등을 지적했다. 케이 보고관은 일본 언론인 100여 명을 인터뷰한 뒤 ‘상당수가 정부로부터 심각한 수준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반발했다. 하기우다 고이치(Hagiuda Koichi) 당시 자민당 간사장 대행은 케이 보고관의 주장이 풍문에 기반한 것일 뿐이라고 직격했다.
사회 문제에 입 닫는 日 언론, ‘정부 앵무새’됐나
그러나 이 같은 외부의 지적들이 일본 언론계의 구조적인 약점을 파헤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제힘을 쓰지 못하는 일본 매체들의 상황을 방증하는 또 다른 예는 지난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준 ‘쟈니스 사태’다. 일본 최대 연예 기획사 중 하나인 쟈니스 사무소의 설립자 쟈니 키타가와(Johnny Kitagawa)가 수십 년에 걸쳐 연습생들을 성착취했다는 사실이 영국 BBC 등의 보도를 통해 드러났는데, 사실 이는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1980~1990년대에도 연습생 12명이 키타가와의 성폭력 혐의를 폭로하고 나선 바 있다. 당시 한 주간지가 이를 보도하며 해외 매체에도 이 같은 소식이 전해졌지만, 다른 매체들의 후속 보도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키타가와 측 배우와 가수, 안무가들의 증언만 보도됐을 뿐이다. 키타가와가 패소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RSF는 언론의 책임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분석했다. 기업과의 유착으로 인해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이야기다. 맥닐 교수 역시 “키타가와의 악행을 수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회사와 방송사들 사이 형성된 상업적 의존관계였다”고 지적했다.
시간이 흘러 키타가와 관련 이슈는 타블로이드 주간지 주간문춘에 의해 재조명됐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보도한 주간문춘 기자들 역시 일본 주류 언론이 이 문제를 보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같은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BBC 다큐멘터리는 일본 매체들의 이 같은 침묵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지난해 8월 독립조사기관은 “조치를 취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쟈니스 사무소는 수십 년간 이어진 학대를 은폐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맥닐 교수는 “주간문춘의 보도는 일본 매체도 다양하고 생생한 보도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업계엔 여전히 자기검열과 금기가 만연해 있다”며 “되레 언론인들이 정부기관의 취재원들과 손잡는 게 장려되는 탓에 황실과 전쟁 범죄, 사형 제도 같은 이슈에 대한 독립적인 보도는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올해 RSF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6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47위에서 크게 떨어진 순위다. 한국이 역대 최하위 순위를 기록했던 건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 2016년으로, 그해엔 70위에 머물렀다. 최상위 순위는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6년, 31위였다. 올해 1위는 노르웨이가 차지했고, 2위는 덴마크, 3위는 스웨덴으로 북유럽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싹쓸이한 모습이다. 중국은 172위, 북한은 177위를 차지했고, 꼴찌는 북아프리카 에리트레아였다.
원문의 저자인 데이비드 맥닐(David McNeill)은 일본 성심여자대학 교수이자 일본 외신기자클럽 언론자유위원회 공동회장입니다. 폴리시 이코노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Politics puppeteers Japan's press freedom | East Asia Forum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