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EU ‘AI 칩 동맹’ 결성, 트럼프식 대중 포위망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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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견제 필요성 공감대 형성
AI 칩 동맹 아키텍처 고착화
글로벌 공급망 양분화 움직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대규모 인공지능(AI) 칩 수입과 미국 보안 표준 채택을 묶은 동맹을 공식화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글로벌 차원의 수출 통제에 반발하던 유럽이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 등 변수를 고려해 전략을 선회한 결과다. 이에 미국·유럽·한국·일본·대만을 잇는 공급망 블록이 고착할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역시 AI 액션플랜으로 예산 증액·수출 제한 강화를 병행하는 등 대중 포위망을 제도화하며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었다.
무역 협상 기점으로 유럽 태도 선회
2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미국과 EU가 기술, 안보, 상업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AI 칩 동맹’을 결성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전날 발표된 공동 성명을 근거로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며 “양국이 제시한 성명서엔 중국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국을 겨냥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양국의 협정은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400억 달러(약 55조 원) 규모의 AI 칩을 수입하고, ‘우려 목적지’로 기술이 유출되는 것에 대비해 미국의 보안 표준을 채택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마로스 세프코비치 EU 무역 집행위원 역시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 동맹국들 투자 심사, 수출 통제 등 경제 안보 조치에 대해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합의를 “민감한 기술에 대한 표준 프로세스”라고 정의하며 “미국 AI 칩이 유럽에 도착하면 이곳에 머물고, 유럽 경제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물론 다른 곳으로 환적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유화적인 분위기는 불과 1~2년 전과 비교해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국은 첨단 AI 반도체의 수출 통제를 전 세계로 확대했는데, 이때 EU는 자국이 한국·일본 등과 달리 예외 대상에서 빠진 데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일부 인사는 미국이 AI 분야에서 철의 장막을 친다고 비판하며 필요한 경우 중국과의 협력에 나설 수 있다는 발언까지 내놨다. 이 때문에 외교계에선 올해 초까지만 해도 유럽이 미국의 반중국 연대에 선뜻 합류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분위기 반전의 신호탄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관세 인하를 꼽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관세 협상을 통해 EU산 제약·반도체에 부과되는 추가 관세를 최대 15%로 제한했다. EU로서는 무역 불확실성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또 다른 계기는 중국을 견제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유럽의 기술·안보 리스크가 확대될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이다. 특히 중국의 희토류·영구자석 무기화 움직임은 유럽 산업계에 직접적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에 “미국과 손잡는 것이 차선의 방어”라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결국 EU는 초기 반발을 접고 미국과 손을 맞잡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번 AI 칩 동맹 합의는 단순한 구매 계약을 넘어 공급망·보안·통상의 세 축을 동시에 아우르는 구조적 공조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유럽의 참여를 통해 대중 수출통제망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됐으며, 유럽은 불확실한 미·중 사이에서 기술 생태계와 시장 접근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유럽·일본·한국·대만 연결망, 민간 협력도 가속
업계는 이번 미·EU 합의로 AI 칩 공급망의 축이 미국·유럽·일본·한국·대만으로 고착할 것이라는 데 전망이 일치했다. 한국과 일본, 대만이 일찌감치 미국 내 생산 생태계와 긴밀히 연결된 가운데, 이번 합의로 공급망이 ‘신뢰 가능한 권역’으로 확정됐다는 진단이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다자적 아키텍처를 제도적으로 굳혀가고 있으며, 유럽까지 합류함에 따라 권역 간 경계선 또한 더욱 선명해지는 양상이다.
이와 함께 민간 부분의 협력 또한 활발해지는 추세다. 대표적 사례로는 삼성전자가 테슬라와 체결한 1,65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계약을 꼽을 수 있다. 해당 공급 계약은 향후 8년간 미국 텍사스 테일러 팹에서 AI 칩을 독점 생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사실상 미·한 공급망 동맹의 민간 버전으로 평가된다. 미국 자동차 기업이 자국 생산거점을 전제로 한국 반도체 기업과 대규모 계약을 맺은 것은 동맹국 간 기술·산업 협력이 한층 심화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소프트뱅크도 최근 인텔에 20억 달러를 투자하며 반도체 협력에 가세했다. 소프트뱅크는 이번 투자가 단순한 지분 참여를 넘어 AI 반도체 공동 개발, 차세대 칩 인프라 강화까지 포괄하는 ‘전략적 동맹’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은 투자 및 협업 사례는 아시아 주요 파트너들을 포섭해 글로벌 칩 동맹의 신뢰권역을 확장한다는 미국의 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전형으로 평가된다.
이 같은 미국의 전략은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에 기회와 부담을 동시에 안긴다. 안정적 수요처 확보는 기업의 기술 신뢰도를 높이고, 투자·고용 확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 시장을 향한 사업 기회가 줄어들고, 규제 리스크 또한 부상하는 형국이다. 미국·EU가 설정하는 보안·재수출 규제가 강화되면, 규제 준수 비용과 기술 이전 제한이 불가피한 탓이다. 결국 미국 주도의 AI 패키지 전략은 동맹국의 독자적 선택지를 축소시키는 부작용 또한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기술 블록화 등 우려도 상존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AI 및 반도체 전략은 대중국 견제라는 명확한 기조 위에서 전개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중국이 AI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개 발언하며 기술 패권 경쟁을 안보 문제와 동일 선상에 놨다. 이후 백악관은 ‘AI 액션플랜’을 발표하고 △첨단 반도체 수출 제한 강화 △연방 정부 AI 예산 30% 증액 △민간·군사 연구 통합 체계 구축 등을 포함시켰다.
정책 강도 역시 이전 행정부와 비교해 한층 높아졌다. 바이든 행정부가 첨단 칩 대중 수출 통제를 단계적으로 확대한 것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글로벌 차원에서 전면화했다. 동시에 액션플랜을 통해 자국 신규 반도체 팹 건설에 40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투입했고, 연구개발 세액공제율은 기존 20%에서 40%까지 두 배로 확대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투자를 넘어 ‘탈중국’ 공급망을 제도적 구조로 고착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는 글로벌 산업 생태계 자체를 재편하는 데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동맹권 내 투자가 늘고 공급망 안정성이 강화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술 블록화와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돼 혁신의 속도가 오히려 늦춰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노선이 ‘중국 견제’라는 목표는 달성할 수 있겠지만, 글로벌 산업 질서에는 불확실성과 비용을 가중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