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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발생 벤츠 EQE, 리콜 전력 있는 중국산 탑재
국토부, 벤츠에 中 배터리 쓴 차량 ‘특별점검’ 지시
유럽은 배터리 제조사 공개 의무화, 한국은 '확인불가'
이달 초 인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EQE에 탑재된 중국산 배터리가 고온 환경에서 장기간 빈번하게 급속 충전되면 화재 위험이 있는 제품으로 드러났다. 앞서 중국 국영 베이징자동차그룹(BAIC)은 발화 가능성 등 제품 결함을 이유로 해당 배터리가 탑재된 차량 3만여 대를 리콜(recall·상품에 결함이 있을 때 생산 기업이 회수해 교환·수리하는 제도)한 바 있다.
인천 화재 '벤츠' 배터리, '값싼 중국산'
8일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화재가 난 벤츠의 중형 전기 세단 EQE에는 중국 전기차 배터리 기업 파라시스 에너지(Farasis Energy 孚能科技) 제품이 탑재돼 있었다. NCM(니켈·코발트·망간) 타입으로, 정확한 모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국토부는 국내 벤츠 EQE 세단에 파라시스의 배터리 셀이 탑재된 차량이 3,000여 대라고 밝혔다.
파라시스는 지난 2009년 중국 장시성 간저우에서 설립된 기업으로, 지난해 매출은 23억2,000만 달러(약 3조1,800억원·점유율 1.8%), 출하량은 15GWh(기가와트시)로 세계 10위권 규모다. 벤츠와 협력이 본격화한 건 2018년이다. 당시 파라시스는 10년간 벤츠에 170GWh(기가와트시) 규모의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2020년엔 벤츠가 파라시스 지분 3%를 인수하기도 했다. 현재 벤츠의 1대, 2대 주주는 모두 중국회사다.
국토부는 현재 벤츠코리아 측에 해당 배터리를 장착한 차량에 대한 특별 점검을 권고한 상태다. 사고 차량과 동일한 배터리를 탑재한 차량에서 또다시 화재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합동감식 결과 화재 원인으로 배터리 결함이나 차량 시스템 문제가 지목될 경우, 전량 리콜 명령을 내릴 예정이다. 사실상 조사 결과 화재의 원인이 ‘방화’가 아닐 경우 리콜 조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한 것이다. 자동차관리법상 자동차 또는 자동차 부품이 안전에 지장을 준다는 판단이 나올 경우 정부는 제작사에 강제 리콜 명령 내릴 수 있다. 국토부가 벤츠코리아에 특별점검을 지시한 만큼, 벤츠가 점검 과정에서 이상을 발견하고 자체 리콜할 가능성도 있다.
발화 가능성에 '리콜' 이력도
파라시스의 NCM 배터리는 중국 현지에서도 품질 안정성 논란이 있었던 제품이다. 지난 2021년 4월 BAIC는 파라시스 NCM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 일부를 안전상의 이유로 리콜했다. 지난 2016년 11월 1일부터 2018년 12월 21일까지 생산된 EX360, EU400 총 3만1,963대가 대상이었다. 당시 BAIC가 밝힌 리콜 사유 핵심은 화재 위험이었다. BAIC는 “고온 환경에서 장기간 빈번하게 급속충전될 경우 배터리 셀 성능이 저하될 수 있다"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결함을 야기하거나 발화로 이어질 수 있어 안전 위험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파라시스도 결함을 인정했고, 리콜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 약 3,000만~5,000만 위안(57억~95억원)을 모두 부담했다. 당시 BAIC는 리콜 범위 내 차량을 대상으로 무료 검사, 수리를 실시하고 모듈과 배터리팩도 교체했다. 안전 제어 관련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도 실시했다. 리콜 사태 이후 기존 최대 고객이던 BAIC가 파라시스 연간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감했다.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파라시스 매출에서 BAIC 비중은 87.6%, 83.6%, 47.6%이었지만, 2020년에는 0.14%로 대폭 줄었다.
전기차 배터리 정보 ‘깜깜이’ 논란
이번 화재로 벤츠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구조도 도마에 올랐다. 앞서 지난 2020년 벤츠 모회사인 다임러그룹은 중국 1위 배터리 회사인 CATL과 향후 출시되는 전기차에 CATL 배터리를 우선 사용하는 내용을 합의했다. 최근 3년간 출시된 ‘EQE’와 ‘EQS’를 비롯해 벤츠, 최상위 전기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EQS SUV’ 등 현재 벤츠 전기차 주력 모델 대다수가 중국 CATL 배터리를 탑재했다. 이 때문에 이번 화재 발생 초반에는 사고 차량에 중국 1위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인 CATL 배터리 셀이 탑재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소비자들 사이에선 차량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에 대한 알 권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배터리가 전기차 안전과 직결되는 핵심 부품임에도 벤츠를 비롯해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정보에 대해선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벤츠코리아에 따르면 벤츠 차주는 서비스센터에 직접 방문해야 배터리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완성차 제조 사가 따로 알려주지 않는 한,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구매할 때 배터리 정보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해외 주요국들이 소비자에게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방침을 이미 정했거나 추진 중인 것과는 상반된다. 유럽연합(EU)은 배터리법에 따라 배터리의 생산·이용·폐기·재사용·재활용 등 전(全)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화하는 '배터리 여권' 제도 도입을 예고한 상태다. 배터리 정보는 배터리팩에 부착된 라벨이나 QR코드를 통해 공개한다. 소비자는 홈페이지에서 배터리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가 부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2026년부터 ACC(Advanced Clean Car)Ⅱ 규정의 '배터리 라벨링' 항목을 통해 제조사와 구성 물질, 전압, 용량 등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ACCⅡ는 캘리포니아에서 판매되는 신차 중 무공해차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의 연도별 비중을 명시하는 규정으로, 전기차의 사이드도어 등 소비자가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라벨을 부착하도록 했다.
중국은 이미 2018년부터 '배터리 이력 추적 플랫폼'(EVMAM-TBRAT)을 구축하는 등 이미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전기차 제조사는 차량 생산과 판매를 위해 공업정보화부(공신부)에 '형식승인'을 받는데 이때 배터리 셀과 팩 제조사, 구성 성분 등 정보를 제출해야 한다. 소비자는 공신부 홈페이지나 전기차 제조사 애플리케이션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내년 2월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이를 통해서는 소비자가 직접 배터리 정보를 알기는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배터리 인증제는 제작사들이 전기차 배터리가 안전 기준에 적합한지를 국토부 장관의 인증을 받고 제작·판매하는 것으로, '정보 공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