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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증권가 ‘인수 타깃 1위’ 버버리 중국 경제 불황에 실적 직격탄 15년 만에 FTSE 100 퇴출까지
영국의 럭셔리 패션그룹 버버리를 둘러싼 인수합병(M&A)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글로벌 명품 대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버버리 인수설이 도는가 하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몽클레르가 버버리를 삼킬 것이란 보도도 나오는 상황이다. 해당 기업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으나, 업계는 최근 버버리 몸값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 인수설이 재부상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몽클레르의 버버리 인수설 '모락모락'
1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몽클레르는 최근 버버리를 인수한다는 보도에 관해 “근거 없는 소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앞서 영국 패션미디어 미스트위드는 몽클레르가 버버리 인수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몽클레르 모기업인 더블R 지분을 10% 보유한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몽클레르의 버버리 인수를 부추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스트위드는 LVMH그룹이 버버리의 인수를 통해 아웃도어 전문 거대기업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버버리의 헤리티지와 몽클레르의 혁신성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란 후문이다.
이처럼 버버리는 수개월째 M&A설에 시달리고 있다. 관련 기업들 부인에도 불구하고 M&A설이 사그라들지 않는 모습이다. 이는 버버리의 실적 부진과 무관치 않다. 버버리는 1856년 설립된 후 특유의 체크 무늬와 트렌치코트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구가했다. 약 170년간 전 세계 '트렌치코트'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정도로 명품 의류 시장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왔다. 2002년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도 지속적 성장과 회복력을 인정받아 런던 주식시장의 대표 지수 'FTSE 100'에 편입됐다.
불황에 지갑 닫은 中 소비자들
하지만 최근 럭셔리 시장의 전반적 침체 속에서 실적과 주가에 타격을 입으면서 버버리의 입지도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역대 최고경영자(CEO)들이 회사 이미지를 되살리고 고급 브랜드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현재 시가총액은 21억8,000만 파운드(약 3조8,900억원)로 작년 말보다 57%가량이 줄었다. 1년 전에 비해선 70% 이상 하락했다. 이에 버버리는 배당금 지급을 중단하고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는 등 본격 쇄신에 나섰으나 결국 FTSE 100에서 퇴출당했다.
버버리의 추락을 부추긴 건 중국인들의 소비 트렌드 변화다. 경제 둔화와 중국 정부의 반부패 정책 등에 따라 중국인들이 지갑을 닫은 것이다. 중국은 세계 주요 명품 소비국 중 하나였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1년까지 10년 사이 중국의 명품시장은 4배 이상 급성장해 660억 달러(약 92조4,200억원) 규모로 커졌다.
그러나 최근 중국은 물론 전 세계 명품 매장엔 한기가 돌고 있다. LVMH 역시 중국 소비 둔화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다. LVMH는 올해 3분기 중국을 포함한 지역의 매출이 16% 감소했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올해 상반기로 예정됐던 매장 오픈도 무산됐다. 지난해 6월 아르노 회장이 직접 베이징을 방문해 주력 브랜드 루이뷔통의 플래그십 매장 개설을 진두지휘지만, 현재 매장 건물 주변에는 울타리만 남아 있다. 이는 명품 기업들이 중국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트렌드 변화에도 둔감
버버리가 지난 흥행에 취해 판매량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공급을 푼 점도 패착으로 꼽힌다. 명품업계에 따르면 버버리는 최근까지 제품 대부분을 현지 에이전트들에 의한 직수입, 도매, 라이선스 방식으로 판매해 왔다. 무분별한 확장 전략을 펼치면서 브랜드 이미지 관리나 가격 통제에 대한 시스템을 적절히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국내 시장을 비롯해 중국 등 일부 국가들에서는 대량 세일이 브랜드 가치 하락과 고급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위기까지 몰고 왔다.
뒤늦게나마 미국 등 대규모 시장 중심으로 도매 비중을 줄이고 제품 유통과 라이선스를 회수하는 등의 수요 통제에 나섰지만 큰 효과는 없는 실정이다. 최대 고객층인 중산층이 버버리에 대한 소비를 줄이고 다른 브랜드들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입는 제품이 식상해진 데다 판매 채널에 따라 가격이 들쑥날쑥한 버버리를 ‘제 돈 주고’ 사기엔 수요를 자극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난립하는 가품도 브랜드에 대한 피로감을 더했다. 버버리가 최근 한국과 중국 시장 등에서 자사의 ‘체크무늬 디자인’과 상표명을 두고 전방위 소송전을 펼치는 것에도 이런 이유가 있다.
시대 트렌드의 변화에 둔감했던 것도 매출 하락을 견인했다. 버버리는 중장년층만을 위한 브랜드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를 고용해 2018년 버버리 로고의 폰트를 현대적으로 교체하고 모노그램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냉랭했다. 일부 패션 비평가는 티시의 스트리트웨어 미학이 젊은 쇼핑객을 일부 끌어들이긴 했지만 영국의 고전적 테일러링에 대한 명성을 활용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설상가상 후드 티셔츠에 올가미처럼 보이는 밧줄 목걸이를 매단 디자인으로 폭력성 논란에 휘말리면서 이미지가 실추됐고 이 과정에서 대중성까지 잃게 됐다.
'저점 매수 기회' 평가도
다만 M&A 시장에선 버버리가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게 증권가 평가다. 주요 패션 대기업들의 인수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버버리는 럭셔리 패션하우스를 운영하는 전 세계 몇 안 되는 브랜드다. 명품 대기업에 속해 있지 않은 럭셔리 브랜드는 에르메스, 샤넬, 토즈, 고야드 등 한 손에 꼽힌다. 럭셔리 부문에서 입지가 부족한 패션기업 입장에선 버버리 인수는 진입 허들이 높은 명품 시장에 곧바로 입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런던 시내 17개 M&A 데스크 펀드 매니저, 애널리스트들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버버리가 인수 표적 1위로 오르기도 했다. 당시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버버리의 M&A 가능성을 점치며 “버버리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유일한 규모의 영국 명품 브랜드"라며 "풍부한 유산과 상징적인 제품 라인과 액세서리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최근 기업가치가 추락한 만큼 저가 매수 기회라는 분석도 있다. 주가가 조정받는 이 때가 버버리를 헐값에 인수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미국 자산운용사 모닝스타에 따르면 버버리의 적정 가치는 주당 13.30파운드(약 2만3,700원) 수준이다. 버버리의 현재 주가가 8파운드(약 1만4,200원) 수준을 밑도는 점을 고려하면 40%가량은 저평가돼 있단 의미다. 여기에 최근 영국 파운드화 가치까지 낮아지면서 잠재적 입찰자들의 인수 의욕을 더욱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