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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주자 상대 유연한 접근 전략 자체 AI 칩 개발 경쟁 본격화 HBM4 승자 메모리 판도 좌우 전망

삼성전자가 브로드컴 공급망에 진입하며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업계 1위 엔비디아와의 직접 거래는 다소 미뤄지고 있지만, 후발주자인 브로드컴·AMD와의 협력을 확대하며 우회 전략을 구사하는 모습이다. 엔비디아는 경쟁사의 자체 칩 개발 시도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중국발 기술 추격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시장 내 존재감 회복 발판 마련
20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에 공급할 HBM3E 8단 제품 양산 준비를 최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3월 브로드컴의 퀄 테스트를 통과 이후 석 달 만의 공급 확정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는 기존 D램보다 최대 5배 이상 빠른 데이터 전송 속도를 제공하는 차세대 고속 메모리로, AI 반도체의 연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이에 앞선 지난 12일에도 AMD에 HBM3E 12단 납품 소식을 알린 바 있다. 지난해 개발된 해당 제품은 24Gb(기가비트) D램 칩을 TSV(Through-Silicon Via) 기술로 총 12단 수직 적층해 총 36GB(기가바이트)의 고용량을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초당 최대 1,280GB의 대역폭을 제공하고, 1,024개의 입출력(I/O) 통로에서 초당 최대 10Gb의 속도를 처리할 수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브로드컴과 AMD를 5세대 HBM 제품 거래처로 확보하면서 기존 엔비디아 중심 구도에서 벗어난 거래처 다변화 전략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들 후발 강자와의 전략적 연대가 삼성전자의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단 관측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의하면 지난해 기준 HBM3E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60%로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마이크론과 삼성전자가 각각 25%, 15% 수준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초기 테스트에서 발열이나 전력 관련 피드백을 받기도 했지만, 브로드컴 사례처럼 통과 제품도 축적 중인 상황”이라며 “오는 3분기 남은 인증 일정을 마무리하면, 연내 주요 고객사 공급망에 재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의 이번 공급 전략은 SK하이닉스 중심의 일극 체제를 견제하고, HBM 시장 내 존재감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우회 반격’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업계 전반의 평가다.
인지도·생태계 우위 엔비디아는 ‘여유’
일찌감치 AI 가속기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는 삼성전자를 기술 동맹으로 점찍은 후발 주자들의 움직임에도 여전히 자신감으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자사의 기술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만큼 경쟁 업체들이 이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란 판단에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비바테크’ 애널리스트 간담회에 참석해 “결국 대부분 회사는 자체 칩 개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며 “그게 쉽다면,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여유로 해석하면서도 이면에 숨은 긴장감을 주목했다. AMD와 브로드컴이 여전히 엔비디아의 주도권을 넘볼 수준은 아니라 하더라도, AI 수요의 분산과 HBM 공급처의 다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 상황은 엔비디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향후 삼성전자의 HBM4 등 차세대 모델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능을 확보하게 될 경우엔 기존 공급망이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황 CEO가 중국발 압력에는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중국 경쟁사들이 진화했다”며 “미국 상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술 기업 화웨이가 상당히 막강해졌다”고 말했다. 미 정부의 수출 통제 조치가 도리어 중국의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단 설명이다. 이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과도 맞물린다는 점에서 엔비디아가 단순히 시장 내 경쟁사는 물론 지정학적 변수까지 염두에 두고 대응 전략을 세우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삼성전자, 6세대 D램 수율 회복하며 HBM4 양산 채비
이런 가운데 시장에선 HBM3E를 이은 HBM4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으로 짜여진 메모리 반도체 판도가 달라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차세대 HBM4의 기반이 되는 6세대 D램 수율을 40%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초기 수율 0% 수준에서 불과 몇 달 만에 큰 폭의 개선을 이룬 것으로, 연내 양산 가능성 또한 매우 높게 점쳐진다.
HBM4는 HBM3E 대비 대역폭이 약 2배 가까이 증가하고, 와트당 전송 속도도 크게 향상돼 연산 처리 효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대규모 언어 모델(LLM) 운용에 필요한 고속 연산 환경에서는 HBM의 성능 차이가 곧 모델 처리 속도, 서버 밀도, 전력 효율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차세대 HBM을 누가 먼저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전략 포인트가 된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브로드컴, AMD 등과 HBM4 공급 계약을 체결할 경우, SK하이닉스 중심으로 형성된 공급망 구도가 실질적으로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HBM4 샘플을 엔비디아에 제공하며 우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 양산 일정과 고객 다변화에서는 삼성전자의 반격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다. 특히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이 HBM4를 ‘회심의 반격 카드’로 내세운 만큼 엔비디아 공급망에 다시 진입할 가능성 또한 농후한 상황이다.
궁극적으로 HBM4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AI 반도체 시장 전체의 파워 밸런스를 좌우할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AI 수요 폭증과 맞물려 메모리 수요 역시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누가 먼저 HBM4 대량 생산 체계를 확보하고 주요 고객을 선점하느냐가 반도체 산업 전체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삼성전자는 그 첫 번째 시험대에 올라선 셈이며, 향후 공급처 재편 여부에 따라 시장 지형 또한 요동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