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국내 주요 기업들이 출산율 제고에 앞장선 모습이다. 그간 정부 정책으로만 인식해 왔던 출산 장려책이 기업들의 복지제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8일 건설사업관리(PM) 업체인 한미글로벌은 셋째 출산 시 승진, 넷째 출산 시 1년간 육아도우미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육아 지원책을 내놨다. 그간 삼성, SK, 현대차, LG 등의 주요 대기업들만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 육아 정책이 중견기업으로도 확대된 셈이다.
민간 기업들의 출산·육아 장려책
한미글로벌은 셋째 출산 직원에게 승진 연한, 고과 등에 관계없이 셋째 출산 즉시 차상위 직급으로 승진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부장급 직원이 셋째를 출산할 경우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어 출산한 직원에게는 90일 법정 출산휴가에 더해 30일 특별 출산휴가를 유급으로 부여한다. 육아휴직으로 인한 승진 불이익도 없앴다. 최대 2년간 사용하는 육아휴직 기간을 근속연수로 인정하고, 심지어 자녀 양육기에는 유연 근무제를 통해 2년간 재택근무도 가능하며, 최대 1억원까지 주택대출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
저출산 정책 관계자는 가장 출산 관련 복지가 우수하다는 인식이 잡힌 공무원 조직보다 높은 수준의 육아 지원이 대기업을 넘어 중견기업에서까지 제공되는 상황이 한국의 저출산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한다. 매출액 1,000억원대의 상장 중견 기업이 경력직 인재 채용을 위해 제공하는 파격적인 복지 혜택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실질적인 수혜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내부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내세운 복지가 아니겠냐는 설명도 뒤따랐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타 대기업들이 다(多)태아에게 추가 휴가 및 수당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다. H모 대기업 계열사에 재직 중인 30대 여성 직원은 "입사 시점부터 결혼까지 여직원의 결혼, 출산을 '리스크(Risk)'로 분류하는 것이 팀 내 인식"이었다면서 사기업에서 여성 근로자가 결혼과 출산을 하는 것이 눈치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정책이 그간 겉돌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출산 지원 정책, 실제 효과는 있을까?
전문가들은 급여가 대폭 오를 때는 출산 지원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주요 기업들이 제공하는 출산 지원은 유인책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미국 투자은행 제프리스금융그룹이 중국 유와인구연구소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한국은 신생아 때부터 18세까지 자녀를 양육하는 비용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7.79배로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중국은 6.9배로 2위를 기록했고, 일본은 4.26배로 중위권이었다. 단순한 휴가, 승진과 같은 지원만으로는 자녀 양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 셈이다.
정부가 내놓은 자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보건복지부는 2012년 보고서에서 자녀 1명당 양육비가 대학생인 21세까지 총 3억896만원이 들어간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10년간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1인당 국민소득의 10배 이상을 자녀 1명당 양육비에 투입해도 평균치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제프리스금융그룹의 보고서에서는 중국, 일본 등과 함께 동아시아 국가들의 자녀 양육비가 국민소득 대비 유의미하게 높은 편에 속한다는 점을 꼬집으며 사교육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주원인이라고 밝혔다.
한 저출산 전문가는 국내 주요 기업들이 내놓는 육아 지원책이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교육비 지원이 구체적으로 제시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저출산, 양육 지원보다 '교육비' 지원이 더 절실
고양시에서 초등학교 자녀 둘을 육아 중이라는 A씨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손이 갈 곳은 줄어드는 반면에 교육 비용을 빠르게 증가한다"며 "학원 보내기가 무서워지고 나중에 대학 가면 어떻게 될까는 걱정이 앞선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가 그간 내놓은 저출산 관련 정책 중 가장 피부로 와 닿은 정책은 보육원 지원뿐이었다고 지적하며 부모의 육아 시간을 줄여주고 체감 급여가 향상될 수 있도록 육아 관련 부대 비용에 대한 지원책이 절실하다는 점도 꼽았다.
제프리스금융그룹의 보고서에서는 “중국에서 18세까지 자녀 1명 양육에 약 7만5,000달러가 필요하고 대학을 졸업하려면 2만2,000달러가 더 들어간다”며 “이는 미국 대학 등록금보다 훨씬 저렴한 것처럼 들리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 등 많은 서구 국가들은 학자금 대출이 더 일반적이어서 학비 부담이 부모에게서 자려 스스로에게로 이전된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2019·20학년에 대학 학부생의 55%가 학자금 대출을 짊어지고 졸업했다.
국내 관계자들도 궁극적인 양육 지원은 기업 내 승진과 육아 도우미 지원이 아니라, 교육비 축소라고 입을 모은다.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입시반'에 들어가기 위해 각종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으면 자녀들이 경쟁에서 낙오한다는 두려움에 빠진 학부모들이 다수인 만큼, 양질의 교육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 저출산 정책의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