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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채용 시장에 불어닥친 한파가 실제 통계로 나타났다. 인크루트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채용 계획을 확정 지은 대기업 가운데 예전처럼 대규모 채용을 실시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같은 신규 고용 위축의 배경으로는 반도체 수출 부진과 20대 인구 감소가 지목된다.
대기업, 세 자릿수 채용 전무
23일 HR테크 기업 인크루트가 올해 하반기 국내 기업의 채용계획 여부와 채용규모 및 방식 등을 알아보기 위해 7월 11일부터 25일까지 국내 기업 727곳을 대상으로 한 채용동향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올해 국내 대기업 10곳 중 7곳(78.8%)이 하반기 채용계획을 확정 지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이후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으나, 올해는 작년 동일조사 기준(80.4%) 대비 1.6%p 하락으로 돌아섰다. 채용 계획이 전혀 없는 곳도 9.6%로 파악됐다.
중견기업도 상승세였으나, 올해 54.4%로 작년 대비 9.6%p 하락했다. 반면, 채용 계획이 없다고 밝힌 곳은 25.2%로, 작년 대비 15.4%p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중소기업의 경우 58.0%가 올 하반기 채용계획을 확정지었다. 이는 작년 대비 9.1%p 하락한 수치다.
채용 규모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하반기 채용계획을 밝힌 기업 중 채용 규모가 확정된 315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기업은 한 자릿수 30%, 두 자릿수 70%였으며 세 자릿수 채용을 계획한 대기업은 한 군데도 없었다. 중견기업은 한 자릿수 74.4%, 두 자릿수 23.1%, 세 자릿수 2.6% 순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채용 규모 축소는 대기업 IT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취업콘텐츠 플랫폼 진학사 캐치가 지난 하반기와 올 상반기 등록된 대기업 공고 수를 비교해 본 결과, 전체 공고 수는 1% 증가했지만, IT 분야의 공고 수는 8% 하락해 타 업종 대비 가장 많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IT·통신 분야 신입 채용의 경우 지난해에 비해 -21%로 크게 줄어 채용 시장의 한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기침체 장기화로 인해 기업의 매출 및 영업이익이 감소하면서 신입보다 경력 위주로 채용하려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경력 공고 수는 3% 증가했다. 상반기 채용 분위기가 좋지 않은 IT·통신 및 제조 분야에서는 감소했지만, 서비스와 교육·출판 분야에서는 70% 이상 크게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공기관 및 회계법인도 채용 축소
공공기관도 채용문을 좁히고 있다. 구직자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공기관은 그 수가 해마다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신규 채용 인원을 축소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1만 명대)부터 매년 증가세를 기록한 공공기관 신규 채용은 지난 문재인 정권 당시 4만 명대까지 폭증했다. 그러나 폭증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2020년 3만645명으로 급락한 신규 채용 규모는 2021년 2만6,946명, 2022년 2만5,356명까지 하락했다. 공공기관들의 부채가 늘어난 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으로 인해 신규 채용 여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윤석열 정부가 강도 높게 추진 중인 공공기관 혁신에 따른 정원 구조조정이 예견돼 청년들의 공공기관 입사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말 기준 44만5,000명인 공공기관 정원을 향후 1만2,000명 줄일 계획이다. 이러한 정원 감축은 퇴직·이적 등 자연감소 등을 통해 해소한다는 방침이라 신규 채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회계 업계도 신입 회계사 고용에 허리띠를 졸라 맬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4대 회계법인(삼일회계법인·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삼정회계법인·EY한영회계법인) 총 채용 인원을 850여 명 수준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340여 명에서 약 36% 급감한 규모다. 일각에서는 경기 침체가 실제화될 경우 내년 채용 인원은 2020년과 같은 750명 선까지 축소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4대 회계법인의 입사 문턱을 넘지 못한 신입 회계사의 상당수는 중견 회계법인에서 수습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회계업계의 한 관계자는 “서현 등 주요 중견 회계법인은 여전히 인력이 부족해 신입 회계사 확보에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올해 공인회계사 시험 최종 합격자 최소 선발 예정 인원은 1,100명으로 결정돼, 일부는 중견 회계법인에서도 수습 자리를 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신규 채용 규모 줄어든 이유
민간 기업들의 신규 채용 축소의 원인 중 하나로 반도체 수출 부진이 거론된다. 23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8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및 경제심리지수(ESI)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달 제조업 업황 BSI는 전월보다 5포인트 하락한 67을 기록했다. 반도체 부문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이달 제조업 체감 경기가 악화한 것이다.
이는 지난 2월 63을 기록한 이후 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BSI는 현재 경영 상황에 대한 기업의 판단과 전망을 바탕으로 산출된 통계로, 부정적 응답이 긍정적 응답보다 많으면 지수가 100을 밑돈다. 이처럼 기업들이 제조업 경기가 더 나빠졌다고 본 이유는 반도체 경기 회복이 당초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수출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경기 둔화 가능성을 고려한 기업들이 좀처럼 채용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더 근본적인 배경으로 20대 인구 비중이 낮은 점도 꼽힌다. 20대 인구 감소에 맞춰 채용 규모를 줄였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고용보험 가입자는 1,515만2천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늘었으나, 유일하게 29세 이하 청년층만 9개월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청년 실업 때문이 아닌 지속적인 인구 감소가 주원인이다. 29세 이하 가입자 감소는 특히 20대 후반 인구 감소의 영향이 가장 크고 도소매, 사업서비스, 보건복지 분야에서 감소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