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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당국, 246조 엔 연기금으로 슈퍼 엔저 방어
GPIF 정기 포트폴리오 조정, 내년 4월부터 적용
달러 매도·엔화 매수 나설 경우 외환 변동 가능성↑
2,000조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는 일본의 대형 연기금이 운용 포트폴리오 개편을 앞두고 있다. 최근 엔화 가치가 3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굴리는 일본 연기금이 보유 자산에 변화를 줄 경우 금융 시장에 미칠 파장에 이목이 쏠린다.
日 연기금, 투자 자산 개편 작업 착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일(현지시각) "시장 분석가들은 일본 연기금이 5년 만에 포트폴리오 개편 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공적연금(GPIF)은 지난 3월 31일 기준으로 자산이 246조 엔(약 2,109조원)에 달한다. 2조8,600억 달러(약 3,958조원)의 자산을 보유한 미국 사회보장신탁기금에 이은 세계 2위 연기금이다.
일반적으로 GPIF은 5년에 한 번 투자 전략을 재검토해 포트폴리오 조정에 들어간다. 이에 따라 새 전략은 내년 4월부터 공식 적용되지만 최근 엔화 약세가 두드러진 상황인 탓에 관심이 집중되는 분위기다. 현재 GPIF는 보유 자산 중 절반이 달러 표시의 주식과 채권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 10년간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해외 자산 비중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2014년 외국 자산 비중을 23%에서 40%로 확대한 데 이어 4년 전 50%로 끌어올린 바 있다.
이는 일본의 다른 대형 기관투자사들도 GPIF의 투자전략을 따라가게 했고, 결국 이를 통해 10년간 미국과 일본의 주가를 부양하는 데 일정 정도 이바지하기도 했다. GPIF의 최근 분기 투자수익률이 전년 동기 대비 23%가량 증가하는 등 성과도 냈다. 하지만 최근 GPIF는 이를 지속가능한 투자 모델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해외자산 투자의 경우 환율 변동성이 높아 위험하다는 점에서다. 뿐만 아니라 해외투자는 '일본 정부가 자국 통화인 엔화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는 신호를 글로벌 시장에 간접적으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이번 결정에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미국 사회보장신탁기금이 미국 국채만 보유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기도 하다.
엔화 가치 제고에 총력
엔화가 3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GPIF가 투자 전략을 조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연초 140엔대였던 달러·엔 환율은 지난 3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한때 161.96엔까지 올라 1986년 12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현재도 160엔 안팎에서 등락하고 있다. 엔저는 도요타 등 수출업체의 경쟁력 강화에는 호재로 작용하지만, 휘발유와 식료품 등 수입품의 일본 내 가격을 치솟게 만든다.
실제로 이 같은 일본의 무역적자는 오랫동안 엔화를 끌어내리는 구조적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에너지 수입국으로서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부터 줄곧 무역적자를 겪고 있다. 원전 가동 중단을 상쇄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수입하면서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올해 1~5월 무역적자는 3조4,500억 엔을 기록했고, 6월 중순까지의 데이터를 포함하면 무역적자는 3조8,300억 엔(약 32조8,700억원)에 이른다.
무역적자뿐 아니라 일본 가계의 해외 자산 매입 폭증도 엔화 약세를 부추겼다. 닛케이 아시아에 따르면 일본 재무성이 8일 발표한 통계 기준으로 일본의 투자신탁운용사와 자산운용사들은 지난 6월까지 매각한 것보다 6조1,600억 엔(약 52조8,500억원) 더 많은 역외 주식과 투자펀드를 매수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같은 기간 일본의 무역적자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닛케이 아시아는 지난 1월 새롭게 개정된 일본 개인저축계좌(NISA) 프로그램이 출범하면서 역외 투자가 활기를 띠게 됐다고 분석했다. 비과세 제도를 등에 업은 자산운용사들이 올해 들어 순증 기준으로 월 1조 엔(약 8조5,800억원) 안팎의 뭉칫돈을 풀면서 해외투자가 활성화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일본 기관투자자의 역외투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은행들이 상반기 중 순매수한 해외자산도 2,207억 엔(약 1조9,000억원)에 불과했다.
이는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이후 저축을 투자로 전환하고 있는 개인 투자자들이 역외 자산에 대한 자금 유입을 부채질한 결과로 진단된다. 일본은 신선식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가 2022년 가을 이후 1년간 매월 2% 이상 꾸준히 상승했다. 5월 CPI도 2.1%로 일본은행의 물가안정 목표치인 2%를 웃돌았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서 2% 이상의 수익률을 내는 금융상품은 거의 없다. 최소 300만 엔의 1년 만기 정기예금 수익률은 지난달 0.1% 이하로 제시됐고, 이달 들어 개인투자자들에게 판매되는 일본 국채 수익률도 1% 미만으로 내려갔다. 이는 3년 또는 5년 고정금리 일본국채(JGB)와 10년 변동금리 일본국채 모두에 해당된다.
게다가 일본 역내 거주자들이 환헤지 없이 뮤추얼 펀드를 통해 달러 표시 주식이나 채권을 매입하면 달러 대비 엔화를 매도하게 된다. 개인저축계좌를 통한 투자 증가가 엔화에 추가적인 약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결국 슈퍼 엔저 장기화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최근 후미오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달러를 팔아 엔화 가치가 더 하락하지 않게 방어하고 있는데, GPIF도 이 일환으로 엔화 자산 비중을 늘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연기금 자산 10%만 옮겨도 200조원
이런 가운데 시장에서는 GPIF가 달러 자산을 팔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근 엔화 가치가 크게 떨어진 만큼 GPIF가 달러 자산을 팔고 엔화 자산을 사들여 엔화 가치를 높이는 행보를 보일 수 있다는 관측에서다. 과거 일본 정부는 엔고 때 매입한 달러를 팔아 엔화를 사들이는 환율 개입을 단행한 바 있는데 당시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 엔화는 2012년만 해도 달러당 80엔에 달할 정도로 비쌌다. 최근 달러당 160엔까지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두 배가량 쪼그라들었다. 80엔에 샀던 1달러를 160엔에 팔았다면 두 배의 차익을 거둔 셈이다.
이와 관련해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경제학자 스테판 앵그릭(Stefan Angrick)은 “10년 동안 달러 비축이라는 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을 보면 지금은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막대하게 쌓인 달러는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하는데 엔화 가치가 추락한 지금 같은 상황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근 시장 상황을 감안할 때 GPIF의 자산 조정이 시장에 끼칠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진단도 적지 않다. WSJ은 “연금 기금이 자산의 10%를 외화에서 엔으로 옮기면 1,500억 달러(약 207조원)가 이동한다는 의미”라며 “외환 시장의 규모가 크고 변덕스럽기 때문에 그런 변동이 엔화 가치 하락을 반드시 막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짚었다.
기금 운용 목표가 연금 수급자들을 위한 수익률 추구에 있는 만큼 외환 시장의 변동과 관련해 단기 대응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야조노 마사타카 GPIF 이사장은 앞서 5일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내년 포트폴리오 조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며 각 자산의 장기 기대 수익을 분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난 회계연도에 달러와 유로화 대비 엔화 가치가 하락했고, 이는 GPIF의 투자 실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서도 “수익률 증대를 위해 엔저를 이용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