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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주요국, 미국산 수입품 관세 인하 등 협상 채비 안보 동맹 EU, 유럽 패싱·관세 폭탄에 독자 노선 강화 트럼프 행정부, 교역국에 中과 거래 제한 압박 가능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호관세를 90일간 유예한 가운데, 아시아와 유럽의 주요국들이 유예 기간 내 관세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협상에 돌입했다. 먼저 그간 중국의 대미 수출 우회 경로로 지목되면서 고율의 상호관세를 부과받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산 제품의 수입 확대와 관세 인하 등을 내세워 협상에 나서는 양상이다. 반면 유럽 주요국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무차별적인 관세 정책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대미 무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다변화 전략에 주력하고 있다.
베트남·태국·캄보디아 등 대미 관계 강화 주력
20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베트남은 최근 미국 항공기 제조사 보잉과 3억 달러(약 4,260억원) 규모의 항공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달 23일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위성 인터넷 기업 스타링크에 2031년 1월 1일까지 베트남 내 시범 서비스를 제공하는 라이선스를 승인하기도 했다. 공식 결정문은 이달 10일 스페이스X에 전달됐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던 지난해 10월에는 트럼프 일가 소유의 부동산 기업이 추진하는 리조트 개발 사업도 승인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말부터 베트남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에 대응해 대미 무역 불균형을 완화하고 양국 관계를 강화하려는 전략적 행보라고 평가한다. 베트남은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였던 2018~2019년 중국을 우회한 대미 수출 경로로 주목받으며 미국의 최대 무역 적자국으로 부상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과의 무역에서 1,235억 달러(약 176조원)의 흑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과의 무역 적자 폭의 두 배에 달한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베트남에 46%의 상호관세를 부과했다.
베트남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각국도 미국과의 무역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협상 준비에 한창이다. 상호관세 36%가 적용된 태국은 피차이 춘하와치라 부총리 겸 재무부 장관을 단장으로 협상팀을 꾸려 4월 셋째 주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석유·에탄·액화천연가스(LNG) 등 에너지 자원과 옥수수·대두·돼지고기·소고기 등 주요 농축산물에 대한 관세 인하를 협상카드로 준비 중이다. 이와 함께 미국산 스트라이커 장갑차 등 방산 장비의 추가 구매는 물론 사이버 보안체계 등 첨단기술 도입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국가 중 가장 높은 49%의 상호관세가 부과되는 캄보디아는 중국의 동맹국으로서 그동안 미국의 관세를 우회하려는 중국 기업의 환적 거점 역할을 하며 이익을 누려왔다. 하지만 캄보디아 정부는 이번 상호관세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측에 서한을 보내 미국산 제품 19개 품목에 대한 관세 인하를 약속하는 등 적극적인 협상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27%의 상호관세가 적용되는 말레이시아는 미국발 관세 리스크에 대비해 아세안 역내 교역 확대와 유럽연합(EU)식 경제 통합을 강조하면서 역내 회복력과 협력체계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WSJ "적·동맹 구분 없이 관세, 동맹 관계 흔들"
미국의 전통적인 안보 동맹 관계를 유지해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유럽 회원국들도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기간부터 유럽 국가들을 관세 정책의 주요 표적으로 지목해 왔으며, 취임 후 이들 국가에는 20%가 넘는 상호관세가 적용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WSJ은 13일 미 정부의 관세 정책을 다룬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장기적 적대국과 충실한 동맹을 구분하지 않고 엄청난 관세를 때리면서 유럽의 오랜 파트너 국가들조차 미국과의 동맹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져 온 대서양 동맹은 우크라이나전 종전 협상에서의 '유럽 패싱'에 이어 이번 관세 부과 조치로 또다시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진단도 나온다. 이에 자체 핵우산 확보 등 안보 자강 논의해 온 유럽은 대미 관세 협상에 나서는 한편 그간 정체됐던 남미·중동·동남아시아 등 제3국과의 교역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례로 EU는 2008년 이후 중단된 아랍에미리트와의 무역 협상을 재개했고,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는 25년 만에 지유무역협정(FTA)을 마무리했다.
EU는 상호관세의 직격탄을 맞은 중국과도 관계 개선에 나섰다. 유럽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을 '가장 큰 외교적 도전 과제'로 지목하며 디리스킹(위험 제거) 전략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미국과의 무역 충돌 속에 유럽과 중국이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되면서 양측이 다시 손을 맞잡는 분위기다. EU는 수년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만큼 "미국으로 인해 대중국 정책이 변하진 않는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지난해 10월부터 중국 정부의 불공정 보조금을 이유로 중국산 전기차에 부과해 온 고율 관세의 폐기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中 시진핑, 美 상호관세 이후 동남아 교역국 방문
관세 정책의 실질적인 타겟인 중국은 미국의 일방적 조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강력한 이웃국이자 최대 교역국을 찾아 공동 대응을 제안하고 있다. 지난 14일부터 18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방문해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번 순방은 미국의 상호관세 발표 이전에 이미 계획된 일정이었으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시급성이 더해지며 관세 대응 논의가 진행됐다. 시 주석은 동남아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보호무역주의와 패권주의에 맞서자"며 "중국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시 주석의 순방에 대해 로이터통신은 "중국은 아세안 3국을 대상으로 매력 공세를 펼치며 미국의 리더십 공백을 파고들었다"며 "중국이 아세안과의 경제 협력을 외교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는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방문"이라고 평가했다. 아세안 국가들이 일대일로 프로젝트 등을 통해 중국과 오랜 기간 경제적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어 당분간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려는 유인이 크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베트남의 철도, 캄보디아의 댐, 말레이시아의 신항만 등 주요 인프라에 대한 건설 비용을 지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의 동남아 순방을 두고 "미국을 망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WSJ은 사안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교역국에 중국과의 거래를 제한하도록 압박하는 도구로 관세 협상을 활용할 계획"이라며 "미국이 각국에 부과한 관세 완화를 대가로 이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기업이 타국을 이용해 상품을 선적하거나, 관세 우회를 위해 타국 영토로 기업을 이전하고 타국에 값싼 중국 상품을 쏟아내는 일을 막겠다는 취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5일 폭스뉴스 자매 채널인 '폭스 노티시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주요 교역국이 미국과 중국 중 선택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며 이러한 전략이 본격 추진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번 전략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2기 무역팀에서 위상이 높아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WSJ에 따르면 베선트 장관은 지난 6일 마러라고 회의에서 해당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전략은 중국 기업이 관세와 수출 통제 등 기타 경제 조치를 우회할 수 없도록 교역국으로부터 양보를 끌어낸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