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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관세에 유예 적용까지, 비논리적 정책에 불신 확산 머니무브 가속화하여 주식·채권·달러 자산 동반 하락 美 자산가는 스위스로, 유학생·연구자는 유럽·캐나다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제조업 일자리 회복을 명분 삼아 몰아붙이고 있는 관세 정책이 전략적이지 못하고 즉흥적이라는 평가 속에 시장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탈미국화(De-Americanization)으로 이어지면서 주식·채권·달러가 동시 하락하는 등 국부(國富)가 미국을 빠져나가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빅테크를 이끌어 온 과학 인재들도 빠르게 미국을 탈출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방문하는 여행객 수마저 코로나19 팬데믹 이래 급격히 줄고 있다.
주식·채권·달러 등 미국 3대 자산의 동시 하락
20일 월스트리트저널(WSJ)는 상호관세와 유예 적용 발표 이후 발생한 주식·채권·달러 등 미국 3대 자산의 동시 하락을 두고 '구조적 신뢰 하락의 징조'라며 탈미국화를 경고했다. 그러면서 "시장의 신뢰 상실은 대통령직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매사추세츠공대 경제학과 사이먼 존슨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을 통해 "시장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관세 구조의 비논리성과 임의성"이라며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살펴보면 중국산 장난감에 145%의 관세를 부과하는 반면, 국가 안보상 중요하다는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등에 부과되는 품목별 관세는 25%에 불과하다. 무역적자가 문제라면서 무역흑자국에도 10% 관세를 부과하는 등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이에 대해 브라운대 정치경제학자인 마크 블리스 교수는 "전 세계가 미국 정부가 방향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다"며 관세 정책의 혼란을 지적했다. NYT는 관세 정책의 반복적인 변경과 예고 없는 철회가 해외 거래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현장 목소리를 전했다.
오락가락 관세 정책에 시장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투자자들은 지난주부터 미국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S&P 500 지수는 이달 초 이틀 새 최대 6% 폭락하면서 시가총액 6조6,000억 달러가 증발했고 달러화의 가치로 급락했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4%에서 4.5% 수준으로 급등했는데, 이는 최근 25년간 가장 가파른 상승세였다. 블리스 교수는 "미국 국채는 어떤 뉴스에도 흔들리지 않던 투자처였지만, 이제는 시장 공포에 따라 매도되는 ‘위험 자산’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145%에 달하는 대중국 관세는 미국의 중소기업에 직격탄이 됐다. 미국 의류·신발 협회(AAFA) 대표 스티븐 라마르는 “높은 관세와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가 코로나19 이후 가장 심각한 공급망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며 “관세가 너무 높아 기업들은 주문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CNBC는 관세 탓에 운임을 지급하지 않아 방치된 해상 및 항공 화물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 항만 규정에 따르면 운임을 지급하지 않거나 통관 지연으로 30일 이상 방치된 화물은 유기 화물로 간주돼 경매나 처분 대상이 된다.
美 법치주의 쇠퇴에 자본의 탈미국 가속화
미국의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스위스로 자산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CNBC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은 최근 몇 달 사이 미국 자산가들을 상대로 투자 계좌 등 자금 이동에 관한 상담이 늘었다. 미국 자산가들이 스위스 금융기관의 문을 두드리는 동기는 다양한데, 다수는 달러화 약세, 관세 부과 리스크, 미국 연방정부 적자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 등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향을 보인다고 CNBC는 전했다. 미국 부유층이 자산 포트폴리오 재구성의 일환으로 스위스를 택한 것이다.
미국 시민권자는 해외금융계좌신고법(FATCA)에 따라 외국 계좌를 개설하려면 엄격한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 미국 주요 은행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된 소수 스위스 금융기관 또는 자산운용사를 투자자에게 추천할 수 있다. 스위스를 거점으로 둔 금융 자문업체 알펜파트너스의 창립자인 피에르 가브리스는 CNBC에 "(고객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며 "관세가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유럽에서 거주지나 제2시민권을 찾기도 한다"며 자산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미국을 떠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스위스의 정치·경제 환경 역시 배경으로 꼽힌다고 한다. CNBC는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경제가 안정적이고 △화폐(스위스 프랑)가 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법체계를 보유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미국 부유층의 ‘자산 탈미국’ 타진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자국 법치주의가 쇠퇴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도 기인한다고 CNBC는 짚었다.
유학생 500명 추방, 80개 대학에서 비자 취소
미국 유학생의 추방도 잇따르고 있다. 국제 교육 비영리단체인 미국 국제교육자협회(NAFSA)에 따르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이민자 추방을 공약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몇 주 새 500명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의 비자를 취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판타 오 NAFSA 최고경영자는 "이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명확한 이유가 부족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며 "앞으로 법적 소송이 쓰나미처럼 일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고등교육 전문 매체 인사이드하이어에드의 추적 조사 결과, 최근 80개 이상 대학에서 유학생들의 비자가 취소됐다. 특히 스탠퍼드, 하버드, 컬럼비아 등 명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자 취소 사례가 급증하고 있으며 형사처벌은 물론 교통 법규 위반 등 사소한 흠을 잡아 비자 취소 이유로 삼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은 지난달 '대학가의 친(親)팔레스타인 시위 참여자 추방' 조치로 최소 300명의 외국 유학생 비자를 취소시켰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대학협회는 "미국 대학에 다니는 100만 명의 유학생들이 미국 경제에 약 438억 달러를 기여했다"며 "국무부와 국토안보부는 (비자 취소가) 미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인재를 품지 못하고 있는 점도 문제지만, 미국 인재들의 해외 유출 흐름도 동시에 짙어지고 있어 미국 대학 교육 역량이 위기를 맞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연구 지원 중단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연구가 중단된 전도유망한 연구자들은 물론, 트럼프발 문화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피신하려는 석학들의 ‘두뇌 이탈’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염려다.
실제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해외 대학에 지원하는 미국 학자·학생 수도 늘고 있다. 오스트리아 중앙유럽대는 다음 학기 프로그램에 지원한 미국인 지원자가 전 학기 대비 4분의 1 정도 늘었다고 밝혔다. 캐나다 토론토대도 최근 몇 년간 규모 대비 미국인 지원자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고 알렸다. 이미 중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변화한 정책으로 자국 과학인재들이 미국에 머무르지 않고 고국으로 유턴하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