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상호관세 발표했다 90일 유예, 美 행정부에 대한 불신 확산 주식·채권·달러 3대 자산 동반 하락하며 머니무브 가속화 美 자산가는 스위스, 유학생·연구자는 유럽·캐나다로 이동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제조업 일자리 회복을 명분 삼아 몰아붙이고 있는 관세 정책이 전략적이지 못하고 즉흥적이라는 평가 속에 시장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이 같은 불신은 국부(國富)가 미국을 빠져나가는 탈미국화(De-Americanization)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여기에 불법 이민자 추방을 앞세운 일방적인 이민 정책이 겹치면서 인재 유출까지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산 철강에 관세 25%, 장난감에는 145% 부과
20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와 적용과 유예 발표 이후 이어진 주식·채권·달러 등 미국 3대 자산의 동시 하락을 두고 '구조적 신뢰 하락의 징조'라며 탈미국화를 경고, "시장의 신뢰 상실은 대통령직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사이먼 존슨 교수도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을 통해 "시장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관세 구조의 비논리성과 임의성"이라며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살펴보면 중국산 장난감에 145%의 관세를 부과하는 반면, 국가 안보상 중요하다는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등에는 품목별 관세는 25%를 부과한다. 또 무역적자가 문제라면서 무역흑자국에도 10% 관세를 부과해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브라운대 정치경제학자 마크 블리스 교수는 "전 세계가 미국 정부가 방향을 잃었다고 느낀다"며 관세 정책의 혼란을 지적했다. NYT도 관세 정책의 반복적인 변경과 예고 없는 철회가 해외 거래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현장 목소리를 전했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의 오락가락 관세 정책에 시장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투자자들이 속속 미국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3일과 4일 뉴욕증시에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가 이틀 새 10% 가까이 폭락하는 등 시가총액 6조6,000억 달러(약 9,382조원)가 증발했고, 달러화의 가치도 급락했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4%에서 4.5% 수준으로 급등했는데, 이는 최근 25년간 가장 가파른 상승세였다. 블리스 교수는 "미국 국채는 어떤 뉴스에도 흔들리지 않던 투자처였지만, 이제는 시장 공포에 따라 매도되는 위험 자산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145%에 달하는 대중국 관세로 물류가 멈춰 서면서 미국의 중소기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의류·신발협회 스티븐 라마르 대표는 "높은 관세와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가 코로나19 이후 가장 심각한 공급망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며 "관세가 너무 높아 기업들은 주문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CNBC는 고율의 관세 탓에 운임을 지급하지 않아 방치된 해상·항공 화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주 항만 규정에 따르면 운임을 지급하지 않거나 통관 지연으로 30일 이상 방치된 화물은 유기 화물로 간주해 경매나 처분 대상이 된다.
美 법치주의 쇠퇴에 현금성 자산도 '탈미국' 가속화
미국의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스위스로 자산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CNBC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은 최근 몇 달 사이 미국 자산가를 상대로 투자 계좌 등 자금 이동에 관한 상담과 비즈니스를 늘렸다. 이들이 스위스를 택한 이유는 다양한데 이들 중 다수는 달러화 약세, 관세 부과 리스크, 미국 연방정부 적자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 등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CNBC는 전했다. 미국 부유층이 자산 포트폴리오 재구성의 일환으로 스위스를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스위스의 정치·경제 환경 역시 자금 이동의 배경으로 꼽힌다. CNBC는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경제가 안정적이고 △화폐(스위스 프랑)가 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법체계를 보유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됐다"고 설명하면서 "미국 부유층 자산의 이탈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자국 법치주의가 쇠퇴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도 기인한다"고 짚었다.
이에 대해 스위스를 거점으로 둔 금융 자문업체 알펜파트너스의 피에르 가브리스 창립자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자산가 고객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우리는 큰 파도를 봤고, 이제 관세가 새로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유럽에서 거주지나 제2시민권을 찾기도 한다"며 "자산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미국을 떠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美 행정부, 80개 대학 비자 취소, 유학생 500명 추방
최근에는 일방적인 이민정책으로 유학생 추방이 잇따르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국제교육자협회(NAFSA)에 따르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이민자 추방을 공약한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500명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의 비자를 취소했다.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의 일환으로 합법적인 비자를 받고 체류 중인 유학생까지 쫓아낸 것이다. 판타 오 NAFSA 최고경영자는 "전례 없는 규모의 조치가 명확한 기준 없이 진행되고 있어 유학생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며 "앞으로 이에 대한 법적 소송이 쓰나미처럼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등교육 전문 매체 인사이드하이어에드가 추적 조사한 결과를 보면 80개 이상의 대학에서 유학생 비자가 취소됐는데 특히 스탠퍼드, 하버드, 컬럼비아 등 주요 명문대를 중심으로 사례가 급증했다. 미 행정부는 단순한 교통 법규 위반이나 과거의 경미한 이력까지 문제 삼아 비자 취소 사유로 적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부 장관은 지난달 "대학의 친팔레스타인 시위 참여자 추방 조치로 최소 300명의 외국 유학생 비자를 취소시켰다"며 "언젠가는 모두 추방해 더는 남지 않기를 희망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젊은 인재 유치와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간과한 결정이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미국대학협회는 "미국 대학에 재학 중인 100만 명의 유학생들은 미국 경제에 연간 44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기여를 하고 38만8,0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며 "국무부와 국토안보부는 이처럼 무분별한 비자 취소가 초래하는 광범위한 파장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NYT도 "외국인 유학생 감소는 대학뿐 아니라 지역사회, 부동산, 소매업 등 다양한 분야에 부정적 파장이 미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해외 인재를 품지 못하고 있는 점도 문제지만, 인재의 해외 유출 흐름이 가속화하고 있어 미국 대학의 교육 역량이 위기를 맞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연구 지원 중단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연구가 중단된 전도유망한 연구자들은 물론, 트럼프발 문화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피신하려는 석학들의 두뇌 이탈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염려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해외 대학에 지원하는 미국 학자·학생 수가 늘고 있다. 오스트리아 중앙유럽대와 캐나다 토론토대는 미국인 지원자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했고 중국에서는 자국 과학 인재의 유턴 현상을 반기는 분위기다.